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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혁 Nov 02. 2024

스마트시티와 도시인

 Smarter baby, smarter -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1. 4차 산업혁명과 스마트시티


    최근 몇 년 사이로 우리 사회가 급격히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완벽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 자율주행이 가능한 자동차가 출시되었고, Chat GPT의 데뷔와 함께 AI가 개인 비서가 되었으며,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이 데이터화되어 수집되고 분석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는 지금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서 ‘산업’은 우리 사회의 변화와 떼 놓을 수 없는 영혼의 파트너이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기관 발명으로 인해 집에서 일일이 손으로 물건 만들던 가내수공업 형태의 노동을 기계로 대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학창시설 사회 시간에 배웠던 18세기의 원조, 즉 '1차 산업혁명’이다. 1차 산업혁명은 농촌을 공장이 밀집한 도시로 변화시키며 기계화 사회를 열었다.

    19세기에는 전기 에너지와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의 탄생으로 '2차 산업혁명'의 대량생산 산업화 시대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컴퓨터의 대중화와 IT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3차 산업혁명'은 산업화 시대를 정보화 시대로 전환시켰다. 이로 인해 세계는 국경을 넘어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되었고, 누구나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3차 산업혁명을 넘어, 2015년 전 세계 쟁쟁한 학자, 정관계 인사, 기업가 등이 모이는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데뷔하였다. 4차 산업혁명은 물리적, 디지털적, 생물학적 경계를 허무는 기술 간의 융합을 의미한다.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빅데이터, 바이오 기술 등은 서로 연결되어 앞서 언급한 자율주행 자동차와 같은 신기술의 집합체를 창조해 낸다. 어느새 우리 삶으로 성큼 다가온 4차 산업혁명은 이제 도시화, 산업화, 정보화를 넘어 지능화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산업혁명의 흐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그러나 김 씨처럼 오토파일럿이 탑재된 테슬라도 없고, 사물인터넷은커녕 집에 100메가 와이파이 밖에 없는 기술에 뒤처진 사람들은 아직까지 4차 산업혁명이 체감되지 않을 수도 있다. 김 씨 같은 사람들이 시대가 전환되고 있구나를 느끼는 포인트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되었을 때부터 전 세계적으로 4차 산업 기술이 집약된 도시인 ‘스마트시티’ 열풍이 불었다. 우리나라 각 지자체에서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스마트시티’를 외치며 똑똑한 도시를 만들기 위한 계획과 정책을 열심히 추진하고 있다.     

    스마트시티가 뭐길래? 우리나라 법을 보면 “도시의 경쟁력과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하여 건설·정보통신기술 등을 융·복합하여 건설된 도시기반시설을 바탕으로 다양한 도시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속 가능한 도시”이다(스마트도시 조성 및 산업진흥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 간략하게 표현하면 건설과 첨단기술을 섞어서 시민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도시인 셈이다. 스마트시티는 첨단기술로 도시 내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도시를 진단하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 가끔 도시를 걷다 지나치는 '현재 미세먼지 현황' 같은 것도 결국 스마트시티의 일환인 것이다. 조금 더 고차원적으로는 도시의 환경오염, 소음, 교통체증, 범죄, 재해 등 다양한 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고 있다. 다시 말해, 스마트시티에서는 우리의 삶이 더 편안하고 안락해지는 것이다!      


예상되는 미래 스마트시티의 모습 (Infineon Technologies)


    하지만, 과연 그게 좋기만 한 것일까? 매 산업혁명을 거칠 때마다 산업의 발전이 우리 사회에 늘 좋은 영향만 준 것은 아니다. 1차 산업혁명은 급격한 도시화로 도시문제를 발생시켰다. 갑작스러운 인구 밀집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인프라 문제로 1차 산업혁명 당시 도시민들의 삶은 처참했다. 2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의 효율성은 증가했지만, 대량생산 체제는 노동력의 비인간화의 원인이 되었다(마르크스 때 다뤘던 소외가 여기서 나타난다!). 3차 산업혁명이 불러온 온 정보화 시대는 우리가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무분별한 정보의 흐름으로 뭐가 맞고 틀렸는지 알 수 없는 상황까지 왔다.     

    4차 산업혁명 첨단기술의 집합체인 스마트시티는 그렇다면 또 어떤 문제점을 우리에게 던져줄 것인가? 스마트시티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만나볼 사회학자의 렌즈로 스마트도시와 도시인을 살펴보도록 하자.     





2.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오늘 만나는 사회학자는 세계적인 비판이론가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이다. 마르쿠제는 비판이론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과학기술과 산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기술산업시대에 대한 그의 이러한 비판의식은 1964년에 집필한 그의 저서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에 잘 나와있다.


멋지게 시가를 피우고 계신 마르쿠제와 그의 저서 '일차원적 인간'

 

    마르쿠제의 렌즈를 빌리기 위해서는 지난번 하버마스 때 잠깐 언급했던 비판이론(Critial Theory)에 대해 잠깐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비판이론은 경제에만 초점을 맞춰 기계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해석하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기 위해 탄생하였다. 비판학파의 뿌리는 저명한 사회학자 아도르노(Theodor Adorno)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를 주축으로 1923년 프랑크푸르트에 설립된 사회조사 연구소(Institute of Social Research)이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라고 불리기도 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요 구성원들 (왼쪽 위부터: 프롬,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로웬탈, 폴락, 노이만, 마르쿠제, 벤야민)


    비판이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 비판과 베버의 합리성 이론을 결합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사회가 외관상 합리적이지만 실상은 비합리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고 보았다. 합리성에는 대표적으로 형식적 합리성(foraml rationality)과 실질적 합리성(substantive rationality)이 있다. 형식적 합리성이 주어진 목적이 무엇이든 그것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에 무분별하게 초점을 맞춘다면,  실질적 합리성은 그 무엇보다 인간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시키는 데 초점을 둔다고 볼 수 있다. 비판이론가들의 시각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실질적 합리성을 간과하고 형식적 합리성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나치 독일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사람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이는 시스템을 갖춘 형식적 합리성의 끝판왕이었다.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 연구소에 합류하여 이러한 비판이론을 형식적 합리성의 한 형태인 근대 과학기술로 확장시켰다. 마르쿠제는 가치중립적이라는 과학기술이 사실은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마르쿠제가 활동하던 시기는 1964년 미국이 현대 기술과 산업 문명의 중심이 되었던 때였다. 당시 미국은 돈과 기술이 집약된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살아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편리했던 때이다. 이런 기술산업사회는 외관상 합리적이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산업사회 이면의 왜인지 부자유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포착하며 기술산업사회의 ‘부자유의 확장’을 경고하였다.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적인 경영과 노동 분업을 토대로 높은 생산력과 생활 수준을 획득한 만큼, 과학기술은 사회의 체제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과학기술은 생산활동의 효율성 논리 속에 산업적 가치가 있는 성과물에만 초점을 맞춘다.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 활동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기술산업사회에서 이러한 과학기술은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개인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고, 산업·경제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창조성과 주체성을 파괴한다. 


산업·경제적으로 쓸모없다는 관점에서 조롱되는 '문과'


    마르쿠제는 이러한 기술산업 사회를 바로 일차원적 사회(One-Dimensional Society), 그리고 거기에서 종속된 무비판적인 인간을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이라 명명하였다. 일차원적 사회의 일차원적 인간은 개인의 선택권과 인간적인 욕구를 잃어버린다. 다시 말해, 일차원적 인간은 인간의 참된 욕구와 거짓된 욕구를 구별하지 못하고, 기술산업사회가 강요하는 산업·경제적 가치를 본연의 욕망처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거짓된 욕구는 인간이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무력화시켜 우리를 1차원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만든다. 기술산업사회의 억압은 대중문화를 통해 문화적 영역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기존에 진리를 추구하던 예술, 종교, 정치, 철학 등은 텔레비전과 같은 매체에서 산업화된 대중문화로 변질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문화는 사회의 지배계층이 대중들의 비판적 사고를 제거하는 데 효율적인 수단이 된다. 즉, 마르쿠제는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이 풍요와 편의성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개인의 다양한 자유와 가능성을 억압하고, 저항의 방법을 망각한 수동적인 일차원적 사회와 인간을 만들어낸다고 본 것이다.




3. 스마트시티와 일차원적 인간


    오늘의 주제였던 스마트시티는 4차 산업혁명의 첨단기술의 집약체로 극강의 효율성에 기반한 새로운 도시 유형이다. 스마트시티에서는 도시 곳곳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 실시간으로 빅데이터 수집이 가능하고, 이를 기반으로 쓰레기 수거, 폭우 예방, 대중교통 배치에 활용할 수 있다. 또한, 도로와 같은 도시 인프라와 ICT 기술(Information & Communications Technology)을 결합하여 자율주행 자동차 운행과 소형 로봇을 이용한 배송 서비스를 실현할 수도 있다. 더불어, 스마트시티 곳곳에 배치된 CCTV는 관제 역할을 하여 교통 체증이 심한 곳의 신호 체계를 유동적으로 바꿔 교통 흐름을 알맞게 조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희망찬 비전에 기반하여 전 세계적으로 정부와 지자체는 속속들이 전 국토를 스마트시티화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문재인 정부 때부터 스마트시티를 정책 기조로 삼고 '스마트 도시 추진전략계획(현재 4차)'을 구축하여 미래 도시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제4차 스마트도시 종합계획' 청사진 (라펜트 조경뉴스)


    과학기술의 진보와 함께 스마트시티가 효율적이고 편리한 도시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여러모로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스마트시티가 ‘인간의 자유와 가능성을 발현할 수 있는 도시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스마트시티는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편의를 위해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지만, 오히려 인간을 무비판적인 일차원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르쿠제의 렌즈로 보면, 스마트시티는 기술과 산업의 측면에 초점을 맞춰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운전을 하는 것은 꼭 어디론가 빨리 가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차를 타고 음악을 틀며 안 가본 길을 택해 능동적으로 드라이브를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스마트시티에 구축된 효율적인 도로 인프라와 자율주행자동차는 우리가 지정한 목적지까지 빠르게 이동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우리가 자유롭게 드라이브할 자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스마트시티 곳곳에서 수집되고 분석되는 빅데이터도 마찬가지이다. 도시 공간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은 그저 하나의 데이터로 기록된다. 인간의 창조적인 잠재력을 발현하는 대표적인 도시 활동인 버스킹도 ‘소음’으로 간주되어 통제될지도 모른다.      

    이와 더불어, 스마트시티는 형식적 합리성을 위해 도시 공간 자체에서 인간성을 제거할 수도 있다. 도시에서 길이라는 것은 참 중요하다. 때로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으며 사색하고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도시에서 인간의 활력소가 된다. 그러나 스마트시티의 주인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로봇이 물건을 배송하는 시대가 오면 구불구불한 길은 직선이 되어야 한다. 배송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이러한 스마트시티의 환경은 형식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인간의 부자유를 확장시키는 비합리적 공간인 것이다. 도시 공간 안에서 무비판적으로 스마트시티가 정해준 대로 활동하게 되는 인간은 매우 일차원적이다. 여기에 정부와 스마트시티를 구축하는 기업은 스마트시티에 대한 ‘혁신’, ‘편의’, ‘미래’ 등의 이미지를 생산하여 거스를 수 없는 기술산업적 진보임을 강조하고, 시민들에게 일종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한다.


스마트시티만 도입되면 모든 도시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세종 스마트시티 국가시범도시)


    이렇게만 들으면 다가오는 스마트시티의 시대가 너무 암울하다. 과연 우리가 지배와 억압이라는 스마트시티의 잠재적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마르쿠제는 '그렇다'라고 말할 것이다. 바로 ‘저항’을 통해서!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와 비판적 능력을 되찾기 위해 연대와 저항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저항은 일차원적 사회가 조작하여 주입하는 거짓된 욕구에서 벗어나 참된 욕구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곧 지배에 의해 조종되지 않고, 자유로운 개인의 사고와 가능성을 지향하는 해방된 욕구를 추구하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인간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회복하여 우리 사회의 지배를 전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믿었다.

    우리 인간은 이미 우리를 지배하는 수많은 시도에 함께 저항하여 ‘억압을 좌절’시킨 경험이 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쟁 거부 운동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권위적인 국가에 저항하여 승리한 경험이 있다. 우리는 저항을 통해 스마트시티가 가져다주는 일차원성에 저항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이미 구글이라는 거대한 기업이 주도하던 스마트시티 조성 사업(Sidewalk Toronto)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승리한 경험이 있다. 2017년 토론토는 구글의 자회사 사이드워크 랩스(Sidewalk Labs)와 함께 토론토의 호숫가를 북미 최대의 스마트시티로 재개발할 계획을 추진하고자 했다. 구글의 기술력에 기반하여 사이드워크 랩스는 도시 곳곳에 센서를 부착하여 기온, 소음, 쓰레기 배출 등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AI로 분석하여 도시의 편의성을 증진시키는 미래 도시를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토론토 시민들은 일차원적이지 않았다! 구글이 만들어내는 스마트시티는 결국 '개인의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편의성을 담보하여 개인정보를 구글에 무상 제공하는 것'이라는 시민사회의 비판이 있었다. 과학기술을 통한 구글의 부당한 감시와 개인정보의 상업화 문제를 토대로 캐나다 시민단체는 정부를 상대로 토론토 스마트시티의 중단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여론에 구글은 버티지 못한고 결국 2020년 토론토 스마트시티 조성 사업을 포기하였다.     


구글이 구상했던 토론토 스마트시티




4.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의 스마트시티


    사실 아직 고차원적인 스마트시티가 만들어진 바는 없어서 스마트시티 세상이 정부와 기업이 제시하는 것처럼 유토피아일지, 아니면 토론토 시민들이 우려하던 것처럼 디스토피아일지 사실은 알 수 없다.      

    분명 스마트시티는 우리 삶을 꽤나 윤택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도시에 구축된 과학 기술이 알아서 다 해준다는 데 몸은 편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스마트시티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일차원적으로 만드는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 도시에 과학기술을 도입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과학기술을 ‘제대로’ 도입하자는 이야기에 가깝다. 이에 거대한 과학기술에 기반한 합리성에 당당히 저항한 토론토 시민들의 사례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토론토 시민들은 거대한 과학기술의 흐름에 굴하지 않고 도시 공간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시민의 권리를 지켜냈다.      

    과학기술에 근거한 형식적 합리성은 아마 지속적으로 우리 삶에 침투하여 우리를 일차원적 인간으로 만들고 지배할지 모른다. 여기에 끊임없이 딴지를 걸고 비판하는 우리의 저항이 필요하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저항을 ‘희망’으로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스마트시티의 시대가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는 결국 우리가 일차원적인 인간이 될지, 고차원적인 인간이 될지에 달려 있다. 과연 우리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스마트시티는 밝고 희망 찬 미래도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음울한 회색빛 미래도시가 될 것인가. 바로 우리들의 손에 달려 있다!               

스마트시티는 유토피아가 될 것인가 디스토피아가 될 것인가 (현대자동차그룹, The Intercept)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1898 – 1979)

    마르쿠제는 1898년 베를린의 부유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상류층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191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1차세계대전 시기라 징집되어 베를린 보병부대에서 말 엉덩이를 닦는(?) 보직을 맡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마르쿠제는 독일 현대 문학과 철학 및 경제학을 공부하여 1922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1929년부터는 당대 저명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와 교수 자격 논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나치에 의해 불발되었다(여담이지만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후 친나치 행보를 보인다...).     

    이후 1933년 마르쿠제는 비판학파의 거목이 되는 사회학자 호르크하이머와 인연을 맺어 당시 정치와 사회 문제를 연구하는 사회조사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나치의 탄압으로 오래가지 못했고,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등 사회조사 연구소 구성원들과 함께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다른 비판학파 학자들보다 미국생활이 잘 맞았는지, 마르쿠제는 미국 첩보국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1940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얻는다.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마르쿠제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이성과 혁명’, ‘일차원적 인간’ 등 그의 진보적 사상이 집약된 연구 결과물들을 집필한다. 이에 따라 마르쿠제는 신좌파 학생들에게 3M(칼 르크스, 오쩌둥, 헤르베르트 르쿠제)의 하나로 불리는 등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지금 우리나라로 치면 장카설(장원영, 카리나, 설윤) 같은 게 아닐까. 그리고 그의 이론은 베트남반전운동 시기와 20세기 후반 세계적인 사회 운동인 1968년 68 혁명에서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 활동에서 마르쿠제의 이론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인해 보수적인 미국 정치권에서 그를 압박하기 시작하였고, 백인우월단체 KKK의 위협을 받기도 하는 등 마르쿠제는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마르쿠제는 1979년 그와 친했던 위르겐 하버마스를 만나기 위해 독일에 방문하는 도중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골함은 아내를 통해 미국으로 옮겨졌지만, 24년이 지난 2003년, 그의 아들 피터 마르쿠제(유명한 진보적 도시계획가이다)의 주도로 그의 유골은 헤겔과 같은 거물들이 묻힌 독일 베를린의 도로텐슈타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일평생 저항과 해방을 외친 마르쿠제의 이론은 오늘날에도 억압된 세상을 바라보는 유효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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