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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지런한백수 Nov 02. 2023

서른을 앞두고 있다.

시험 후 멘탈 관리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이 또 끝이났다.

2번째 시험이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나고 난 뒤 허무감과 아쉬움, 우울감을 2주가 지난 현재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감정의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노력한 과정에 대한 결실이 아쉬울 거 같아서? 왜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나는 벌써 주저앉아 남몰래 울고 있는가? -실제 울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울고 있다.-


혹시 작년에 아쉬운 성적은 인정할 만 하지만 올해 아쉬움은 인정 못하겠어서? 노력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아직 나오지 않은 결과에 대한 이른 아쉬움 때문인지 스스로에게 솔직해보자 물었다. 듣는 이도, 묻는 이도 나 혼자인데 '나' 는 대답을 우물쭈물한다. 진짜로. 다 버려보고 대답해봐. 네가 아쉬운 건 '결과' 에 따른 '나' 의 존재 가치에 대한 것이니. 아니면 '노력'에 대한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니. 솔직해보자.


아무래도 전자인 듯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른 생각을 할 게 필요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만 나이로 1-2살씩 줄었다고 하지만 내년이면 서른인 주변적 나이는 변하지 않는다. 30. 서른을 앞두고 더 싱숭생숭해진 탓도 있으리라. 20대 끝인 29세까진 다음이 있는 느낌이지만 30은 아닌 느낌이 선했다. 나는 결국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나려 애쓰다 기준의 틀로 들어와 '서른' 이란 인생의 전환점 같은 나이에 짓눌린 것이다. 이것이 다 시험 때문이라고?


무언가 하려면 '시험' 을 벗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20대 때 배운 외국어와 내가 평생 공부하며, 내가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번역이란 생각에 공부에 매진했다. 언어란 배워도 배워도 아쉬움만 남고 쓰지 않는 그 잠깐의 시간에 망각이 되어 스스로의 능력치에 대한 질문도 늘고, 잘 하고 있는 것은 맞나 의구심이 들게하는 아주 요망한 것이다. 하긴, 한국어도 우리가 생각해보면 그리 능통하게 하지 못하는데 외국어라고 갑자기 뛰어나지겠는가. 시험을 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썼지? 싶은 것들은 결국 그 극도의 긴장감이 맴도는 시간을 이겨내지 못한 내 실력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엄마를 만나, 보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올해 진짜 열심히 했는데. 그 아쉬움이 울음으로 터져나왔다. 요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감정이 매말랐다고 혼자 고개를 저어놓고 말이다. -시험 준비로 모두가 한 번씩 울었다고 했을 때 스스로에 놀랐다. 나? 안 울었는데? 울 시간이 없었다.- 시험이 끝난지 어언 2주가 흘러도 마음은 타들어갔고, 일기장에 마음을 적어내보아도 비슷했다. 틀린 것들이 기억나 시간과 삶을 깎아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는 발표 전까지 무얼 그리 고통스러워하냐고. 일단 발표 전까지의 시간은 즐기라고 한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어느새 <안 됐을 때>의 미래를 도모해야 했다. 그 시간이 매우 고통스럽지만 이미 그것이 확실시 되기라도 한 듯. 하지만 과거처럼 희망을 안고 '다음에' 에 대한 기약이 쉬이 상상되지 않았다. 고통스러웠다. 다음엔? 언어는 느니까 괜찮겠지. 그러나 또 긴장한다면? 내년에 또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드라마나 영화를 볼 정신도 없었다. 남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내 정신과 감정을 소비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비교적 '나'에게 하는 말 같은 책을 집었고, 영상을 보고 싶으면 유튜브에서 자기계발 관련된 콘텐츠들을 찾아 시청했다. 그러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나는 과거처럼 '미래' 의 찬란함에 설레어하지 않고, 무얼하고 살아야 할까? 란 질문을 던지지 않고,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 최근 2년은 그랬다. 그것이 내 길과 방향성의 1차 과정을 정해서인지 그 과정을 아예 시도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사고 자체에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전자라 믿고 싶다. 이유가 어쨌든, 꿈을 위해 나아가는 이 시간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정체성을 결정짓고,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며 방향성을 확고히 하고 나라는 사람을 단단하게 해주었던 질문들을 거둔 것이다.


너무 열중하느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고 해보았다.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꿈과 목표를 향해 달려가며 나라는 사람의 중심을 지키던 것에선 멀어졌다. 어떻게 본인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는지,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상황에서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등, 질문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해보자! 각잡고 다이어리를 펴고 앉아 펜을 집어 무언가 쓸 수 없었다. 생각? 무슨 생각을 해야하지? 이런 의문이 드니 덜컥, 공부하는 동안, 전혀 자각하지 못했던 나이가 스물스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 내년에 서른이네? 이래도 되나? 내가 이 일을 계속 하고, 포기하지 않기 위해선 내가 단단해져야 하는데 서른이란 사회적 지표가 찾아온 셈이다.


그리하여 나라는 사람이 단단하면 필요 없다 생각했던 자기계발에 대해 찾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이 들었다. 보면서 드는 생각 또한 형체가 없어 흩어져 결심 또한 흩어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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