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월, 감염병 관리 업무를 보던 부산시청에서 연제구 보건소로 자리를 옮겼다. 보건소 근무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보건소장으로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건물에서 함께 일하는 100명이 넘는 직원들. 아직 40대 초반인 내가 보건소장이라는 막중한 업무를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전 근무지에서 가져온 짐 상자를 책상 위에 풀고 사무용품들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어가며 무엇이 최적일지 구상했다. 그때 보건소 안의 크고 작은 살림을 챙기는 서무가 소장실을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인쇄물 한 장을 보여주었는데, 그 종이에는 다음 일주일간 내가 소화해야 할 일정이 빽빽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서무에게 되물었다. “제 일정을 원래 이렇게 준비해 주시는 건가요?” 서무가 그렇다고 했다.
그 세심함과 친절함이 고맙긴 했지만, 한편으로 나의 일정을 다른 사람이 관리해 준다는 게 영 어색했다. ‘서무도 다른 일이 많을 텐데 굳이 보건소장 일정까지 챙겨야 하는가’라는 의문도 들었다. 그때 불현듯 머릿속에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남이 인쇄물로 일정을 정리하게 할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온라인으로 일정을 관리하며 그걸 직원들이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언제든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구글 캘린더로 업무 일정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공유 URL로 직원들에게 배포하면 되었다.
여러 장점이 있겠다 싶었다. 먼저, 이렇게 하면 내가 나의 일정을 가장 잘 파악하게 된다. 직장에 다니는 이들이라면 다들 공감하겠지만, 사전에 예정된 일이 취소되기도 하고 없던 일이 새로 생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넋 놓고 있다가 중요한 회의에 준비 없이 들어가게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중요한 약속을 겹치게 잡을 수도 있다. 이렇게 시시각각 바뀌는 일정을 매주 한 차례 인쇄물로 정리해서 갖고 있다는 것은 시의성도 떨어지고 일 처리의 주도성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나는 직원이 “소장님, 10분 뒤에 회의 가셔야 합니다”라고 말하길 기다리기보다 내가 직원에게 “우리 10분 뒤에 회의 가야지요?”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한편, 직원들 각자의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우선 서무부터 보건소장 일정 정리에 쓰던 시간을 보건소 전체에 도움이 되는 일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참석할 행사나 회의를 담당한 직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그 직원이 내 일정을 모른다면 매번 나를 찾아와서 나의 일정 중 빈 시간을 확인해야 할 텐데, 내가 자리에 없을 수도 있고 (그럴 때 나에게 직접 전화하면 좋겠지만) 직원에 따라서는 내가 자리에 돌아와서 소장실에 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는 쪽을 택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보건소장의 일정을 확인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직원들의 본래 업무에 대한 집중도를 떨어뜨릴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 일정표를 직원들 각자가 자신의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내가 선약이 없는 빈 시간에 알아서 일정을 맞추고 나에게는 그 결과만 알려주면 될 터였다.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면, 온라인 일정표가 처음 취지대로 잘 운용되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직원들이 내게 일정을 추가할 수 있는지 물어보며 이미 내 온라인 일정을 확인하고 비는 시간임을 확인했다고 말할 때, ‘아, 그래도 이 시스템이 웬만큼 작동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흐뭇해진다. 온라인 일정 공유가 없었다면, 직원은 내게 회의가 있는데 언제가 괜찮을지 묻고, 거기에 나는 달력을 보면서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이 가능한데 수요일은 오전만 가능하다고 답하고, 그럼 그 직원은 다시 일정을 맞춰서 다시 찾아오고… 이런 식으로 쓸데없이 시간이 낭비될 터였다. 온라인 일정 공유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었는데, 온라인 일정표에 아무 일정이 없는 날을 바라보며 초조함을 느끼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초조함은 혹시라도 직원들이 소장이 너무 한가하다고 여기면 어쩌나 하는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없는 일정을 거짓으로 채워 넣지는 않겠지만, 비어있는 공간이 많으면 혹시라도 다른 직원들이 이것을 보고 내가 논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내내 신경이 쓰였다. 직원들의 시간을 아낄 수 있게 하려고 만든 장치가 도리어 나를 옭아매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내 심리의 저변에는 다른 이들에게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직 내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행태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무의미한 행위들은 결국에는 스트레스를 일으킨다. 연제구 보건소에서는 오후 6시가 되면 일과가 끝났음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사무실 천장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진다. 그러면 한 무리의 직원들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우르르 사무실 밖을 나선다. 아, 사실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이 아니라 실제로 기다리고 있던 이들도 많을 것이다. 나도 그럴 때가 있으니까. 그런데 6시에 칼퇴근을 하는 직원들이 그 직전까지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었을까. 5시 50분, 아니 그 전에 일찌감치 일을 마치고 6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퇴근 시간을 알리는 음악에 맞춰 사무실 문을 나서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그럴 바에야 그냥 양심껏 일찍 나가면 안 되는 걸까.
바빠 보여야 한다는 강박, 일이 없어도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는 말 못 할 사정. 이런 것들이 비단 나만의 고민은 아닐 테다. 오늘날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이라면 아마도 다들 경험해 보았을 듯싶다. 하지만, 이것을 정확히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치료를 하려면 일단 진단명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증상은 있지만 병명이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다들 치료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때, 제목부터 시선을 잡아끄는 책이 한 권 있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하는 『가짜 노동』이다.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진짜 일은 아니라는 의미가 담긴 ‘가짜 노동’이라는 제목,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걸 정확히 지적한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이라는 부제에 모든 핵심이 담겨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아네르스 포그 옌센과 데니스 뇌르마르크. 그들은 현대 직장 문화와 노동의 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진 연구자들이다. 아네르스 포그 옌센은 사회학과 심리학을 접목한 연구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조직 내 개인의 행동과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그리고 직업 만족도에 관한 다양한 학술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의 연구는 주로 직장인들이 겪는 심리적 압박과 그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데니스 뇌르마르크는 경제학 배경을 가진 연구자로, 노동 시장, 조직 행동, 그리고 생산성 향상 방안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쌓았다. 특히 노동의 효율성과 관련된 정책 개발에 참여하며, 실제 조직에서 적용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하는 데 큰 관심을 보여왔다. 뇌르마르크의 연구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노동의 가치와 그 영향을 분석하여, 보다 효율적이고 만족도 높은 노동 환경 조성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부에서는 노동에 관한 기존 연구를 광범위하게 검토한다. 노동의 역사적 배경, 사회학적 및 경제학적 관점에서의 노동 이해,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노동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탐색한다. 저자들은 여러 학문 분야의 연구를 종합하여 노동의 개념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 현재 우리가 직면한 노동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토대를 마련한다. 이를 통해 가짜 노동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그다음, 2부에서는 실제 현장을 방문해 가짜 노동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을 수집하고 이를 통해 가짜 노동의 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저자들은 직장인, 관리자, 그리고 프리랜서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바쁜 척, 무의미한 회의, 업무 시간의 부풀리기 등 가짜 노동의 다양한 형태와 그로 인한 개인적, 조직적 문제점을 조명한다. 이러한 실제 사례들은 가짜 노동이 어떻게 개인의 직업 만족도와 조직의 효율성을 저해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가짜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이 부분은 특히 관리자들이 자신의 팀이나 조직에서 가짜 노동을 줄이고, 직원들이 의미 있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돕는 구체적인 전략과 조언을 담고 있다. 나에게는 이 부분이 가장 와닿았고 유익했다. 저자들은 개인의 업무 방식 개선뿐만 아니라 조직 문화의 변화, 목표 설정의 중요성, 그리고 피드백 시스템의 효율적 운영 방법 등을 포함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안한다. 이러한 해결책은 독자들이 실제로 자신의 업무 환경에서 적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언을 제공한다.
두 저자는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에서 직장인들이 직면하는 가짜 노동의 문제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들의 연구는 직장 내 비효율적인 노동 관행이 개인과 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노동의 질을 높이고, 직장인들이 더욱 의미 있는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사실,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일단 이 책이 다루는 경제학, 심리학, 노동 시장이라는 소재가 익숙지 않은 분야이기도 했고, 거기에 더해 저자들의 주 활동 무대인 북유럽은 여러모로 우리나라 상황과 다른 점들이 많아 보였다. 말하자면, ‘가짜 노동’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진 강렬한 인상과는 다르게, 이 책이 나에게는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책에서 다루는 상황과 인터뷰를 통해 소개되는 여러 일화를 읽으며, 이것이 곧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다음 내용을 기대하며 한 장 한 장 읽어나갈 수 있었다.
마지막 책 장을 덮으며 나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일을 할 때 어디에 중심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각성이다. 지금까지 내가 바빠 ‘보이고’ 싶었고, 더 성실해 ‘보이고’ 싶었으며, 규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 ‘보이고’ 싶었던 데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지를 남의 시선을 통해 판단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외적 동기’를 따른다고 한다.
가짜 노동을 피하고 더 나아가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적동기’에 집중해야 한다. 내적동기란 쉽게 말해서 남들이 뭐라건 스스로 만족스럽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걸 말한다. 내가 하나의 일에 전력을 다한 결과 느낄 수 있는 독립되고 충만한 만족감에 집중하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일정을 정리하고 그것을 직원들에게 공유하는 행동을 예로 들어보면, 그것이 나 스스로 즐겁고 보람이 되어서 한다면 ‘내적동기’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에게 내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외적동기’에 의한 것이다. 이 둘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는 같아 보일지라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결국 내 중심이 확고해야 가짜 노동을 피할 수 있다. 남의 가짜 노동을 지적하는 것보다 내 가짜 노동을 살피는 것이 먼저인 이유다. 내가 보건소장으로 처음 발을 내디뎠던 날, 직원의 가짜 노동을 줄여주려고 했던 온라인 일정표가 어느 사이엔가 나 자신이 다른 직원들에게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도구로 쓰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때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걸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고, 이 책을 통해 ‘내적동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답을 얻었다. 앞으로도 혹시 내가 외적 동기에서 비롯된 가짜 노동에 빠지진 않는지 늘 살펴야겠다. 남의 시선이라는 ‘외적동기’가 아닌 내 일에 전력을 다함으로 느끼는 행복감, ‘내적 동기’를 쫓아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
원문: https://shinseungkeon.com/%ea%b0%80%ec%a7%9c-%eb%85%b8%eb%8f%99/ | 신승건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