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할까. 우리가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문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무엇 덕분일까. 무엇이 자유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로켓에 탐사선을 실어서 화성까지 보낼 수 있게 했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분야마다 나름의 전문가들이 있고, 그들 저마다의 견해가 있겠지만, 나에게 묻는다면 약간의 망설임 뒤에 ‘글’이라고 답하겠다. 글을 읽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하는 능력이야말로 침팬지와 인간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우리가 누리는 이 문명은 글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는 중요한 지식을 발견하고 기록할 때도, 여러 사람과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뜻을 모을 때도, 심지어 혼자 조용히 사색에 잠겨 생각을 정리할 때도 글이라는 수단을 수족처럼 이용한다. 물론 일상적인 대화는 글 없이도 가능하지만, 그 깊이와 지속시간은 극히 제한적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의미 있고 복잡한 내용을 다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글이라는 수단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러한 글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이제 글보다 영상이 대세라고 말한다. 이제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으며 그 대신 스마트폰 화면 속 유튜브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고 즐길 거리를 구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지금 당장 길거리에만 나가 보아도 수많은 이들이 굽은 가로등처럼 스마트폰에 시선을 처박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상이 글의 자리를 밀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사태의 단면만을 보고 있다. 영상의 기본 뼈대도 결국 글이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도 시간을 들여서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상은 정교한 기획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것의 토대는 결국 글이다. 그 어떤 창작물도 글이라는 도구 없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콘텐츠 소비자의 관점에서도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체계성과 효율성, 원하는 정보를 거듭해서 참고할 수 있는 활용성이라는 면에서도 글은 영상보다 월등하다.
물론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뜻이 없고,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집어주는 대로 눈앞에 나타나는 영상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삶을 살아도 괜찮다면 굳이 글을 읽고 쓰는 데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에서 어떤 의미 있는 것을 성취하고 싶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금 글을 읽고 쓰는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함은 명백하다.
심지어 글은 점점 더 중요해질 전망이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문명의 중심이 된다고 한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글은 여전히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ChatGPT 등 현재 상용화된 인공지능의 활용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적절한 프롬프트를 작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프롬프트 즉, 인공지능에게 지시를 내리는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는지 아닌지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수준을 판가름하는 것이다. 음성 명령은 예외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결국은 음성으로 전환된 글일 뿐이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글쓰기는 중요한 능력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9살 짜리 딸이 글과 가깝게 지냈으면 하고 바라는 이유다. 세상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왔고, 지금 나의 예측도 분명 미래에는 많은 부분이 틀린 것으로 판명될 테지만, 글을 잘 다룰 수 있는 힘이 앞으로 딸이 살아갈 세상에서도 여전히 중요하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흐름이 아니라 변치 않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지금 내가 딸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변치 않는 글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거라고 믿는다.
다행히 나와 아내 모두 책 읽기를 좋아한다. 10여 년 전 아내와 내가 처음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을 때, 아내는 부산에서 나는 서울에서 각자의 직장에 다니느라 주말에만 만날 수 있었다. 그 시기에 우리는 책을 한 권 정해서 각자 읽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식으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랬다. 나중에 결혼을 하고 보니 거실 책장에는 같은 책들이 두 권씩 있게 되었고, 우리는 그 중 절반을 적당한 곳에 기증하였다.
그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이제 세 명이 된 우리 가족은 주말에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도서관에 가서 다만 한 두 시간이라도 책을 읽다 오곤 한다. 아빠가 자신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딸에게 책을 읽으라고 백날 이야기해 봐야 그 말을 듣지 않을 게 당연하기에, 일단 나부터 책을 들고 읽는 모습을 보여준다. 집에서도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종이책을 읽으려고 한다. 처음에는 잘 안되었지만 요즘에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습관이 되어서 오히려 책을 읽는 게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진심이 딸에게도 전해진 걸까. 요즘에는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딸아이도 조용히 자기 책을 가져와서 옆에 앉는다. 역시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만 한 게 없다. 아니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 책을 읽기는 읽는데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저렇게 빨리 책을 읽는다고? 고개를 내밀어 슬쩍 들여다보니 십중팔구 만화책이다. 아빠 마음 같아서는 그래도 줄글이 있는 책을 좀 읽었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서 그 중요하다는 ‘문해력’도 좀 키웠으면 좋겠는데, 딸아이가 정작 재미를 느끼는 건 다른 종류인 듯하다. 하기야, 세상일이 어떻게 다 내 마음처럼 될 리가 있나. 나도 아이였을 때 부모님 말씀대로 안 했는데, 내 딸이라고 다를 리 없지. 그나마 스마트폰 대신 책을 집어 든 딸이 기특할 뿐이다.
딸아이에게 만화책도 좋지만, 장문으로 이야기책도 한 번 보면 어떻겠냐고 슬쩍 떠보았다. 빔프로젝터로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는 점을 떠올리며,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읽는 건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는 것과 같다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를 혹시 솔깃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던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런 시도들이 어떤 의미가 있겠나 싶은 생각에 이르러 그만두게 되었는데, 하나는 말을 호숫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는 건 말이 원해야 한다는 속담이 떠올랐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만화를 즐겨보았던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굳이 만화책 보는 걸 막기보다는 그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 자체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하지만 딸아이에게 긴 글로 쓰인 책을 읽게 하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출퇴근 길에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앞에 읽던 페이지로 돌아가기 위해 중간에 끼워진 끈을 당길 때면, 불현듯 딸아이도 이런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밥을 먹을 때에도, 일과를 끝내고 샤워를 할 때도,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이 오길 기다릴 때도, 어떻게 하면 딸아이가 긴 글이 담긴 책을 읽게 할 수 있을까, 글을 많이 읽고 많이 쓰게 할 수 있을까, 좀처럼 답이 보이지 않는 의문들을 풀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고민했다. 한 가지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해결책을 만난다고 하던데,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올까. 다행히 그 말은 진실이었다. 어느날 종이책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주제의 책을 읽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선물처럼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딸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9년 전 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로 구르던 시절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만남을 이어가던 당시의 여자 친구, 즉 지금의 아내와 자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편지를 주고받으며 달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쩌다 보니 지금도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는데, 평일에는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마음 한편에 늘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담아서 딸아이와 편지를 주고받는다면 훗날 이 시간을 미련보다는 행복으로 기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거다 싶었다.
처음에는 그 정도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지만, 딸아이와 편지를 주고받겠다는 계획을 다듬을수록 이것이 내가 가진 고민 중 많은 부분을 해결해 줄 열쇠가 되겠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딸에게 편지쓰기를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 힘들고 귀찮아질 때쯤 다시 그것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이 도전이 딸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삶에 가져올 변화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다. 지금부터 나열하는 ‘딸에게 편지쓰기의 효과’는 순전히 나의 게으름에 대한 대비책인 것이다.
첫째, 편지 쓰기는 딸로 하여금 긴 글과 친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 책은 안 읽어도 아빠가 직접 쓴 글이라면 읽지 않을까. 내가 내 삶의 이야기를 담아서 책을 썼던 것도 딸이 아빠가 쓴 책이니 이거 정도는 읽을 것이라는 기대가 그 밑바탕에 놓여있었다. 마찬가지로 비록 몇 장짜리 편지지만 내가 직접 펜으로 쓴 것이니만큼 아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라도 읽을 것이다. 그게 계속 이어지다 보면, 그러면서 내가 쓴 편지에 담긴 글의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 달리 말해 상대방의 의도를 짐작하는 훈련이 이어지다 보면, 아주 조금씩 그러면서도 시간이 지나서보면 현격하게 글을 읽는 실력이 자라나 있을 것이다. 문해력이 뭐 별건가.
둘째, 글을 읽는 것을 넘어서 쓰는 즐거움도 알아갈 것이다. 편지에 답장을 쓰는 것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적 활동을 수반한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글에 담은 의미를 파악해야 하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할 수 있을 정도로 주도적인 사고가 가능해야 한다. 이어서 그러한 생각들을 정리하여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러한 글을 답장으로 받게 될 상대방의 마음도 미리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게 편지를 받아서 답장하는 과정에 종합선물 세트처럼 담겨있는 것이다. 딸이 나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할 수 있게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글쓰기 훈련은 없을 것이다.
셋째, 딸과 아빠 사이에 더욱 진솔한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누구든지, 어떤 관계에서나,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그 시간이 아무리 넉넉하게 주어지더라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마음의 깊이가 있다. 말이라는 것은 미리 준비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한번 말하면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다르다. 글을 쓰고 읽는 과정을 통해 좀 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서 주고받을 수 있다. 말로 하는 대화로는 실현할 수 없는 수준의 서로 간의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사실 딸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약간의 염려가 퍼즐의 마지막 빈자리처럼 남아있었다. 내가 편지를 쓰는 거야 어떻게든 마음먹고 하면 되는 것이지만, 과연 딸아이도 거기에 편지로 화답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딸도 나에게 답장을 해주어야 나도 다시 답장을 하고, 또 다시 딸이 답장을 하고, 이런 연쇄작용이 이어져야 편지를 통한 읽기와 쓰기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단 나부터 편지쓰기를 시작했다.
며칠 뒤, 딸 아이가 답장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괜한 것으로 드러났다. 딸은 태어나던 순간부터 아빠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지체 없이 답장을 써주었다. 초등학생 3학년다운 내용과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채워진 두 장짜리 편지지에는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빠에 대한 바람과 아쉬움 그리고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내가 아직 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직접 해보기 전에는 결코 몰랐을 소소한, 그렇지만 가볍지 않은 행복이었다. 딸과 주고받는 편지는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갈 생각이다. 이제 나는 이 글을 블로그에 올리고 다시 딸에게 편지를 쓰러 가봐야겠다.
원문: https://shinseungkeon.com/%eb%94%b8%ec%97%90%ea%b2%8c-%ec%93%b0%eb%8a%94-%ed%8e%b8%ec%a7%80/ | 신승건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