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by 신승건의 서재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는 피렌체(Firenze) 공화국의 고위 관리였다가 메디치 가문(Medici)의 복권과 함께 실각했다. 고문을 받고 추방된 뒤, 피렌체 외곽의 작은 농장에서 『군주론(Il Principe)』을 썼다. 말하자면 권력의 작동 방식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았던 사람이, 그 권력에서 밀려난 뒤 쓴 책이 『군주론』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책에 흐르는 긴장감이 사뭇 서늘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권력을 가진 자의 교만이 아니라, 권력을 잃은 자의 냉정한 성찰이다. 세간에서는 이 책을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권력론으로 읽는다. 그러나 정독해 보니 이 책은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는 저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인간은 변덕스럽고 이익 중심적이다. 대중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지도자를 판단하고, 상황이 바뀌면 마음도 바뀐다. 사랑받는 군주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군주 중 어느 쪽이 더 안전한가. 마키아벨리의 답은 두려움이다. 사랑은 의무감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이익 앞에서 쉽게 소멸하지만, 두려움은 그보다 견고하게 지속된다.


단, 그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두려움과 증오는 다르다. 지도자가 군대와 대중으로부터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토록 거머쥐고자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진다. 로마 황제들의 사례가 이것을 보여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군대와 민심의 균형을 지켰고 오랫동안 통치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는 군대를 확실하게 장악했다. 반면 코모두스(Commodus)와 막시미누스(Maximinus Thrax)는 대중의 증오를 샀고, 페르티낙스(Pertinax)와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는 군대에 의해 무너졌다. 증오와 경멸은 그것이 어느 방향에서 온 것이든 지도자에게 치명적이었다.


이 책의 핵심은 두 단어로 압축된다. 바로 그 유명한 포르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ù)다. 포르투나는 행운, 혹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이다. 비르투는 그 앞에서 인간이 발휘하는 역량과 주도성이다. 단순히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힘 전체를 가리킨다. 마키아벨리는 운을 강물에 비유한다. 홍수는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제방을 쌓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포르투나가 아무리 거세도 비르투를 갖춘 사람은 그것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는다. 이 두 힘의 긴장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이 두 단어를 마주하며 나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였다. 체육 시간이 되면 친구들은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그 가장자리에 혼자 쪼그려 앉은 채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글씨를 썼다. 뛰지 못하는 것을 억울하다고 생각했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냥 그것이 내 자리였다. 지금의 나로서 그 아이를 바라보니, 그것은 분명 그의 포르투나였으리라. 처음부터 다르게 주어진 조건. 그러고 보면 그 아이가 운동장 구석에서 혼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비르투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학부를 졸업한 후에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나는 지도 교수를 깊이 신뢰했고, 어느새 스스로 생각하는 수고마저 내려놓았다. 교수가 어련히 나를 알아서 잘 이끌어 주겠거니 하며 그저 믿었다. 비르투를 길러야 했던 시기에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을 게을리했다. 그 게으름의 대가는 실로 혹독했다. 교수가 약속했던 장밋빛 미래는 언제든 번복될 수 있고, 나에게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뒤이어 깨달았다. 맹목적인 신뢰가 나를 위한 최선의 판단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책을 계속 읽어 나갔다. 이윽고 용병에 의존하는 군주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문장에 이르렀다. 손이 멈췄다. 연필을 들어 밑줄을 그었다.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용병은 평시에는 쓸 만하지만 위기가 오면 흩어진다. 그들에게 군주의 나라는 월급이 나오는 곳일 뿐이다. 군주가 자국 군대를 갖지 못하면 그는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손에 맡긴 것이다. 밑줄이 그어진 대목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나의 서른 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환자와 의사를 연결하는 스마트폰 기반 의료 플랫폼을 창업했다. 내심 보란 듯이 성공하여 대학원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시의 나는 근거 없이 낙관적이었다. 잘될 것이라고 믿었고, 그 믿음은 판단을 흐렸다. 사무실을 계약하고 개발자와 마케터를 뽑았다. 좋은 사람들이었고 열정도 넘쳤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사업 모델은 현실에서는 돈이 되지 않았고, 직원들에게 월급은 줘야 했기에 급한 대로 돈이 될 만한 일거리를 끌어왔다. 애초에 회사를 세워서 만들려고 했던 것들은 점차 뒤로 밀려났다. 나는 직원들에게 비전은 고사하고 월급을 주는 것조차 허덕이는 사장이었다. 뒤늦게 알고 보니 일부 직원은 급여를 받으면서도 다른 회사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계약 하나가 들어왔다. 건너 건너 소개받은 이가 간곡하게 부탁하며 가져온 것이었는데, 나는 주의했어야 마땅한 위험 신호를 읽지 못했다. 돈이 들어올 수 있다는 기대와 직원들 월급을 줘야 한다는 절박감 사이에서, 그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 계약은 나중에 여러모로 불공정한 것으로 드러났고, 도리어 큰돈을 내줘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결국 나는 큰 빚을 지고 회사 문을 닫았다.


그 당시 나는 경멸받는 리더였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원칙보다 관계를 앞세웠고, 불편한 순간을 피하려 했고, 그 결과로 스스로를 가장 위태로운 상태로 내몰았다. 비전으로 사람을 묶지 못하고 급여로만 붙들었으니, 처음부터 용병으로 군대를 꾸린 것이었다. 마키아벨리가 경고한 그대로였다.


회사를 정리하던 날, 아버지가 왔다. 아버지는 반평생을 은행에서 일했다. 그는 말없이 장부를 펼쳐 들고 내가 미처 보지 못한 회계의 매듭들을 하나씩 풀어 나갔다. 아버지는 내가 사업을 하는 동안 묵묵히 믿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좌초되었을 때는 크게 다치지 않도록 안전망이 되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내게 포르투나이기도 했고 비르투이기도 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주어진 존재였고, 동시에 내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기꺼이 와서 매듭을 풀어 준 사람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언어로는 다 담기지 않는 무언가가 아버지에게는 있었다.


『군주론』은 군주에게 쓴 책이지만, 읽는 내내 나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오늘날 평범한 사람에게 힘이란 무엇인가. 나는 지금 공무원으로서 매일 어려운 자리에 선 사람들과 마주한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군대를 갖는 것도, 영토를 다스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도움이 절실한 이들 곁에서 작은 힘이라도 되는 것, 외부의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는 것, 흔들리는 직원들 앞에서 중심을 잡는 것. 운동장 구석에서 나뭇가지로 바닥에 끄적이고 있던 아이가, 아버지가 망한 회사를 수습하는 모습을 경외의 눈빛으로 지켜보던 남자가, 이제 다른 사람들의 위기 앞에 서 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을 건넬 수 있는지 나는 아직 배우는 중이다.


마키아벨리가 실각 후 농장에서 이 책을 썼듯이, 어쩌면 비르투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내게 그랬듯이,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군주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그 질문은 여전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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