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을 맞이하며 만든 모임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입잘클럽》. 입 열면 잘난 척 클럽이다. 시대를 너무 앞서 갔던 것일까? 두 살 생일도 맞이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었던 비운의 조직(?)이지만,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있어 소개해볼까 한다.
멤버가 되기 위해서는 '잘난 척'에 대한 꽤 까다로운 조건들을 충족해야 한다. 우선, 자연스러워야 한다. 쭈뼛쭈뼛하면 안 된다. 어색함은 금물이다. 마치 잘난 척을 하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온화한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잘난 척'을 해야 한다. 눈빛이 흔들리는 것은 절대 금지이다.
다음으로는 순수해야 한다.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잘난 척'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는 과정이 아니다. 고양이가 세수를 하듯 수시로 반복하여 스스로 자존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자기 수련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속하다 보면 힙합에서 이야기하는 바이브 비슷한 것이 생기게 된다.
마지막이 가장 어렵다. 아무리 앞선 두 가지에 적합한 사람이라도 최후의 관문을 넘지 못한다면 바로 아웃이다. 가는 채로 돌멩이를 걸러내듯 부적격 판정을 받는다. 세 번째 자격은 바로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유쾌하다는 인상까지 주어야 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잘난 척을 들으며 즐겁기는 쉽지 않지만 이 요건만은 양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상대를 불쾌하게 하는 잘난 척은 그냥 거만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게 최고점을 안 주면 누가 주겠냐?"
세월이 지나 '입잘클럽'을 만들었다는 것조차 잊힐 무렵 회사 선배 하나가 나를 일깨워 주었다. 당시 회사에서는 연말마다 자기 평가라는 것을 하였다. 부서장 평가 이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정도의 의미였던 거 같다. 점수는 대체로 후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원래 나에 대해 가장 너그러운 사람은 나니까. 그래도 대부분 어느 정도 선을 지켰다. 왠지 스스로에게 최고점을 주는 것은 쿨하게 느껴지지 않았는지 약속이나 한 듯 일부 항목에서는 인간적인 점수에 체크했다.
그러나 그 선배는 달랐다. 순간의 고민도 없이 자신을 완벽히 유능한 직원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용감한 그 선배는 사실 유능한 직원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공자가 부서장이라면 최하점을 받았을 사람이다. "행동은 민첩하게 하고 말은 신중하게 하라(敏於事而愼於言, 민어사이신어언)"는 논어 구절을 데칼코마니처럼 정확히 반대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새벽에 출근해서(남들보다 한 시간은 일찍 출근했다) 사내 전화를 시작한다. 통화는 보통 담당 임원이나 부서장이 출근할 때까지 이어진다. 일에 미쳐 사는 직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통화 내용은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중간중간 중요한 정보가 오간다. 정보 교환이 이루어진다. 이런 특성으로 통화 상대는 보통 급이 높았다.(그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은 보통 직급이 높다) 그러고 나서 일과가 시작되면 나름의 고급 정보를 조합하여 하루 종일 이야기한다. 고급 정보를 들어서일까? 본인의 급을 높게 생각하는지 자잘한 실무는 거의 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인 나는 결국 물어보고야 말았다. "선배는 진짜 본인이 만점이라고 생각해요?"(쓸데없는 호기심만 감췄더라도 부장은 달고 퇴사했을 것이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나의 의아한 표정이 읽혔는지 선배는 바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나에게 최고점을 안 주면 누가 주겠냐?"
스스로를 인정하기 어려운 사회 vs. 나대야 하는 시대
나를 사랑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이제 엄마 친구 아들만이 비교 대상이 아니다. 자랑스러운 아무개의 이야기는 세계 도처에서 들려온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의 연봉이 복싱하는 아무개가 1초에 벌어들인 돈이란다. 광클로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 티켓을 사고 기뻐하는데, 아랍 아무개는 7살 난 딸 생일 파티에 그 가수를 불렀단다. 무리하게 대출받아 산 집은 어린 스타 아무개가 최근 입주한 집의 거실 만하단다. 허탈하다. 스스로를 존중하기 어렵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데 남이 나를 인정해 줄 리 없다.
유명인의 쓸데없는 소식에는 밝은 사람들도 정작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다. 내가 관심이 없는 만큼 주변 사람들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느낌이다. 비교를 통해 낮아진 자존감은 무관심으로 인해 다시 한번 뚝뚝 떨어진다. 마치 지킬박사가 비운 자리를 하이드가 차지하듯, 자존감의 공백은 자존심이 메우고 만다. 빗나간 자존심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나는 더욱 고립된다. 자존감은 바닥을 향해 간다.
이 상황에서 사회는 우리에게 목소리를 내라고 한다.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에게 말이다. 나대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성공은 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세상에서는 많이 시도하는 사람이 기회를 잡는다. 우리가 운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시도를 하려면 나대야 한다. 자신을 표출해야 기회가 주어진다. 스스로를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나대야 하는 현실. 그 괴리가 우리를 괴롭게 한다.
시대를 바꾸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내가 바뀌는 수밖에 없다. 유년기에 자존감이 잘 보존된 복 받은 아씨(또는 도련님)가 아니라면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어쩌면 나는 '입잘클럽'을 통해 자존감을 연습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대성공이다. 어려서부터 수줍음 많던 소년이 누구나 인정하는 '자존감 킹'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자존감도 연습해야 한다. 우선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발끝만 봐서는 자신을 사랑하기 어렵다. 자칫 자존감이 날카로운 자존심으로 변질되며 고개 숙인 나를 베어버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