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 현장을 떠올리면 나는 늘 두 번 반응한다. 먼저 몸이 긴장하고, 그 다음에야 생각이 따라온다. 거기에는 관리되지 않은 공기가 있고, 정제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사회가 만들어 둔 필터가 거의 작동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 이력도, 평판도, 말솜씨도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오로지 오늘 하루 몸을 써서 버텨낼 수 있는가만이 기준이 되는 장소. 그래서일까. 나는 그곳을 생각하면 늘 조금 무섭고, 동시에 묘하게 다시 가고 싶어진다.
우리가 사는 대부분의 공간은 ‘검증된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학교, 회사, 모임, 심지어 친구 관계까지도 보이지 않는 기준과 선별 과정을 거친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기 전에 이미 한 번 걸러진다. 최소한의 예의, 최소한의 사회성, 최소한의 이력. 그래서 안전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인공적이다. 말은 부드럽고 태도는 정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현장에는 그런 포장이 거의 없다. 말투는 거칠고, 표정은 숨기지 않고, 피곤함과 짜증과 체념이 얼굴 위에 그대로 놓여 있다. 거기에는 사회에서 조금씩 밀려난 사람들, 너무 일찍 실패해버린 사람들, 빚을 갚기 위해 몸을 혹사하는 사람들, 말보다 한숨이 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어쩌면 범죄 이력이 있는 사람도, 인생이 크게 꺾여본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 가능성을 생각하면 본능이 먼저 경계 태세를 취한다.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앞에서 긴장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지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실제로 그곳에 서 있었을 때도 그랬다. 안전한 세계의 소음과는 다른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의 눈빛은 친절하지 않았지만 솔직해 보였다. 누가 어떤 삶을 지나왔는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지만, 동시에 묘하게 또렷해지는 감각이 있었다. 마치 내가 평소에 보던 인간의 ‘역할’이 아니라, 역할이 벗겨진 ‘상태’를 보고 있는 느낌. 거기서는 직업보다 피로가 먼저 보였고, 성격보다 생존이 먼저 느껴졌다.
나는 그 감각이 두렵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날것의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것의 인간은 반드시 따뜻하거나 정의롭지 않다. 지성이 다듬어 놓은 말 대신 거친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배려보다 짜증이 먼저 드러나고, 이해보다 생존이 우선되는 세계. 거기에는 내가 익숙한 대화의 규칙도, 완충 장치도 부족하다. 나는 그 세계의 날것의 비지성, 생각보다 먼저 반응하는 감정과 본능의 영역을 마주하게 될까 봐 두렵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나는 또 그곳이 궁금하다.
지성이 잘 작동하는 세계에서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고 정리한다. 생각은 다듬어져 말이 되고, 말은 다시 이미지가 된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는 생각이 말이 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추상적인 신념이나 가치관보다 오늘 벌어야 할 일당이 더 중요하고, 인생관보다 허리 통증이 더 절실하다. 나는 그런 세계가 인간을 축소시키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어떤 본질에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는 모순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곳으로 갈 상상을 한다. 여전히 조금 무섭고, 여전히 긴장되지만, 분명히 심장이 더 또렷하게 뛰는 공간. 나는 아마 그곳에서 사람들의 교양이나 말솜씨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무게를 먼저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무게 앞에서, 내가 평소에 붙들고 있던 생각들이 얼마나 가벼운지도 함께 느끼게 될지 모른다.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일어나는 감정은 흔치 않다. 대개 그것은 우리가 어떤 진짜에 가까워질 때 나타난다. 노가다 현장은 나에게 단순한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까지 내려가도 다시 일어나 몸을 움직이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소다. 거기에는 실패도 있지만, 동시에 집요한 생존이 있다. 무너진 사람도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몸이 있다.
아마 나는 그곳이 아니라, 그곳에 모여 있는 가공되지 않은 삶들, 그리고 그 삶들 속에서 지성이 벗겨진 채 드러나는 인간의 맨얼굴을 다시 마주할 순간을 기다리며 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