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을 가장한 미친 모험을 저질렀다
제주도에 산지 만 3년이 지나자 내 안 깊숙이 숨어 쥐 죽은 듯 숨만 쉬던 역마살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 나를 콕콕 찔러댔다.
'얼른 떠나!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더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 그럼 뜨는 수밖에 없어!'
역마살을 가장한 나의 무모한 모험 정신에 불을 지핀 건 3개월 전 우연히 접한 이숙명 작가님의 어느 칼럼이었다. 술친구들 방해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곳을 찾다 서울에서 월세내고 사느니 차라리 발리에서 6개월 살기로 결심하고 이민가방 들고서 도착한 뒤 정신 차려보니 다이빙센터 매니저가 되어있었다던 그녀의 글에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한 것이다. 3년 머물던 서귀포를 떠나 제주시로 이사하려 집을 보러 다니던 나를 온통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한 글이었다. 평생 틈만 나면 이사하시던 유목민 엄마를 빼닮아 한곳에 정착 못하는 내가 살아본 나라는 영국, 프랑스, 스위스, 뉴질랜드, 호주이고 총 10년이 훌쩍 넘는다. 살면서 지내본 집을 다 세본적은 없지만 백 군데는 족히 넘을 것이다. 집주인 없는 동안 집을 봐주는 하우스시팅도 스무 군데 넘게 해 봤으니까.
그런 떠돌이가 지구상에 정착하고픈 동네를 찾았고 그곳이 바로 우붓이었다. 인도네시아 발리섬 중앙에 위치한 숲이 우거진 우붓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주생활을 완전히 정리하며 짐을 홍당무로 거의 팔고 남은 건 아버지댁에 보내 맡겼다. 기부하고 버린 물건도 수백 가지가 넘었다. 미니멀로 산다며 소파, 전기밥솥, 전기포트도 없이, 겨울 옷 반 이상을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고 지지궁상으로 살았는데도 이 지경이었다. 이놈의 짐 때문에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외국으로 또 나간다는 게 정녕 미친 짓 같았다. 숙소와 항공권을 예약하고 나서도 두려웠다. 아무리 정리해도 꾸역꾸역 나오는 짐에 치여 죽을 것만 같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렇게 버리고 나눠주고 팔고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발리로 이고 지고 온 짐은 40kg가 넘었다. 위탁수하물은 29kg, 기내용 수화물은 12kg, 거기에 배낭까지 매고 있었으니 내 몸무게만 한 무식한 짐을 끌고 온 거다(무식하고 용감해서 모험을 저지른 인간입니다).
하고 싶은 걸 못하면 병이 나는 내게 엄마는 살아생전 늘 말씀하셨다.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라고. 남자를 만나도 아무 남자나 만나지 말고 좋은 남자가 분명 나타날 거니 나이 찼다고 아무 하고나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런 좋은 세상에 결혼 따위 안 해도 된다던 엄마말씀만 믿고 좋은 남자 기다리다 살짝 늙어버리긴 했지만 난 정말 하고 싶은 걸 거의 다 하고 산 것 같다, '결혼'과 '경제적 자유'빼고. 그래도 결혼을 안 해서 언제든 훌쩍 떠날 자유가 있으니 미혼인걸 감사히 여기는 중이다.
할머니가 되고 나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대형캐리어 끌고 갈 기운이 아직 남아있을 때 모험을 강행하고 싶어 발리로 왔다. 이민가방을 들고 처음 영국땅을 밟았던 스물여섯 살 소녀시절만큼 힘이 넘치고 상큼하진 않지만 적어도 등이 굽거나 노안이 오진 않았다. 사지 멀쩡히 바른 자세로 아직 걸을 수 있고, 두 눈으로 여전히 새로운 걸 보고 느낄 수 있으니 더 늦기 전에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지난주 심호흡 크게 하고 마음 텅 비우고서 발리로 왔다. 내 마지막 청춘을 불태우러,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죽을 때 못해본 걸 후회하는 것보다 '내가 이런 짓도 했다니!'라고 하는 게 더 낫다고 하지 않는가.
예술하기 좋은 환경 그리고 건강을 위해
자연친화적인 환경과 신비롭고 아름다운 건축물, 그리고 동네 골목길에 널린 멋진 조각상은 우붓에 온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언젠가 진정한 예술가가 되고 싶은 그림쟁이를 만족시켜 주는 발리의 예술적인 환경은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적의 조건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아름다우면 심신이 평온해지는 심각한 심미안의 소유자는 이곳에서 정서적으로 건강해짐을 느끼고 있다.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몸까지 건강해졌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끔찍한 만성 비염이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났고 미세먼지가 적어 늘 쫄아있던 기관지가 안정을 되찾았다. 코발트블루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감격에 겨워 두 손을 모아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날씨가 따뜻하니 잘 때 수면양말을 신지 않아도 되고 겨울에 얼어 죽을 일도 없는 발리다. 더워서 모공이 왕창 열려 피부가 와르르 무너져도 추위에 떠는 것보단 낫다. 그래도 한국보다 여름이 선선하고 시원해 에어컨을 틀지 않고 지내고 있다. 밤엔 두꺼운 이불을 덮어도 추워서 깰 정도이고 비가 내릴 땐 긴팔을 챙겨 입는다.
친절한 발리 사람들
따뜻한 날씨 덕분인지 사람들도 잘 익은 열대과일처럼 스윗하다. 길거리에서 눈만 마주쳐도 순박하고 정이 듬뿍 담긴 큰 눈을 반달처럼 만들며 웃는 발리사람들이 푸근하다. 요가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발리 사람들은 걱정거리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매일 크게 웃어서 흘려보낸단다. 웃음은 면역력을 강화시켜 심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최고의 약이라고 하셨다. 그래서일까. 안달복달하는 사람들을 보기 힘들다. 한 번은 길을 걷다 심상찮은 굉음에 뒤를 돌아보니 오토바이를 몰던 젊은 남자가 커브길을 돌다 넘어져 오토바이와 함께 쓰려졌다. 그런데 그는 헤헤 웃으며 일어나는 게 아닌가! 나 같았으면 오만상 찌푸리고 욕하며 일어났을 일에 그 발리남자는 순수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방금 그에게 다가온 불운을 스스로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표정은 마치 방금 막 사랑고백을 받은 듯 수줍고 해맑았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같이 있다 보면 향을 싼 종이가 좋은 향을 머금듯 나도 조금은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해 줬다.
요가의 천국 발리라서
힌두교의 종교적, 영적 수행방법 중 하나인 요가는 힌두교도들이 80%가 넘는 발리의 중요한 키워드다. 요가를 십여 년 전 석 달 배운 게 다인 나지만 발리에 휴가 올 때마다 요가수업에 참여했고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떼 지어 요가해 자리가 부족했던 요가공장 같은 요가반(요가하며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건 환상적이었다), 멀리 보이는 바투산 뷰가 비현실적으로 환상적인 인튜이티브 플로우 요가, 귀여운 강아지들과 함께 한 퍼피요가 그리고 호텔에서 공짜로 한 요가수업까지 발리에서의 요가수업은 모두 좋았다. 특히 인튜이티브 플로우에서 요가를 마치고 요가원 옆에 자리한 옐로 플라워 카페에서 오래전 볼케이노였던 정글뷰를 바라보며 한들한들 춤추는 노란 꽃들과 눈 쳐진 강아지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 기분은 지구 위 최상류 층이 된 듯 한없이 행복하고 풍요로웠다. 한편으로는 지구 어딘가에선 전쟁과 기아로 사람이 죽는데 이렇게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을 만큼 미안한 마음도 올라온다. 그럴 때마다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라 송구하다.
먹거리 해결
제주에 사는 동안 비건이 된 후 일반식당에서 밥 먹는 게 어려워 주로 집에서 해 먹었다. 요리를 좋아하지만 손이 느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7첩 반상 한번 차려먹으면 진이 다 빠져 설거지하기도 귀찮았다. 발리로 온 지금은 채식당이 널린 덕분에 매일 외식을 한다. 가격도 저렴하고 채식당이 아니어도 비건옵션을 어느 식당에서든 고를 수 있어 좋다.
한국식당도 많고 슈퍼마켓에서 한국음식도 쉽게 발견할 수 있어 향수병 치유도 손쉽다. 며칠 전엔 빈땅 슈퍼마켓에서 묵은지 1kg를 사 왔다. 인도네시아 산 김치는 처음 먹어봐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표고버섯, 다시마로 국물을 내 김치찌개로 푹 끓여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신선하고 달콤한 열대과일을 싸게 먹을 수 있는 것도 발리의 최대 장점 중 하나다. 제주도에선 극빈층이라 비싸서 못 먹던 망고를 여기에선 2천 원가량이면 사 먹을 수 있고 새콤 달달한 맛이 아찔하다.
껍질무게가 과육의 10배는 될 것 같은 망고스틴은 껍질을 까서 하얀 과육을 입에 넣는 순간 과즙이 불꽃놀이처럼 펑펑 터지며 혀가 극락을 체험한다.
짙은 홍당무 빛 과육이 먹음직스럽고 상큼한 파파야는 부드럽고 씹기 쉬워 아침에 먹기 좋다.
수박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지만 당도가 높지는 않다. 베트남에서 먹은 과일이 가장 달고 맛있던 기억이 있다. 코코넛은 태국, 베트남에 비하면 맹탕이고 단맛이 적지만 그 특유의 청량감이 좋아 밍밍해도 자주 사 먹는 과일이다. 질 좋은 유기농 코코넛 오일도 슈퍼마켓에서 저렴하게 살 수 있다. 느끼하게 느껴지던 코코넛 향이 최고품질의 오일에선 풍기지 않고 영혼까지 상큼해지는 기분에 계속 바르고 싶어진다. 모기 물린 곳에 살살 펴 바르면 간지러움이 줄어들고 머리를 감고 물기 있는 상태에서 발라주면 머릿결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아침마다 먹는 사과와 레몬은 수입산이라 그리 싼 편은 아니지만 상태 좋고 맛도 괜찮다.
발리는 한국에서 가깝고(유럽에 비하면) 시차도 1시간밖에 나지 않는 최고의 여행지로 알려져 있다.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어 포화상태라 최근 발리정부에서는 500ml 페트병 생산을 금지하고 관광세를 부과해 환경을 지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항상 계획 없이 노니는 떠돌이 노마드라 언제까지 발리에서 살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일단 두 달간 지낼 숙소는 예약해 둠) 내가 이곳에 살지 않아도 발리가 늘 아름답게 간직되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