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서 방콕 가는 비행기 안에서 노마드 채식주의자가 먹은 자연식물식
호주에서 3개월을 머문 뒤 태국으로 향하던 2026년 1월 어느 날의 기내식 기록이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 가격이 가장 저렴하게 나온 XX항공 편도 티켓을 작년에 예매해 놓고 시드니에서 출국 전 생각해 보니 경유할 때 드는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아깝고 청결과 서비스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돈을 좀 들여서라도 괜찮은 항공사 직항을 탈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용 후 만족했다. 서비스와 청결상태 및 기내식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XX항공을 이용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오래전 호주에 2년 머물며 몇 번 이용했는데 생각보다 음식이 맛있었기에 나쁘지 않은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그땐 채식하기 전이었고 뭐든 잘 먹어 비행기에서 주는 대로 군말 없이 받아먹었다.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온 비행기 안에 퍼지면 잠시 후 스튜어디스가 음식이 가득 담긴 소중한 보물 같은 수레를 밀고와 치킨과 소고기 중 뭘 원하냐고 천사처럼 물어본다. 잠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이윽고 고른 음식을 맛있게 먹었지만 채식을 하게 되면서부터 항공권을 예매한 뒤 항공사 웹사이트나 앱으로 들어가 직접 기내식을 바꾼다. 어찌 보면 귀찮은 일이지만 원치 않는 음식을 받아먹거나 버리는 것보다 백배 낫다고 본다.
내 좌석은 정확히 기내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승객이 많지 않아 빈자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양옆엔 건장한 청년과 과체중의 중년 남성이 자리해 중간에 낑겨앉아 어깨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팔받침대도 못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아저씨가 자꾸 내자릴 침범해 신체를 계속 접촉하는 상황까지 와 몇 번을 참다 이륙하고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기만을 기다렸다 스튜어디스에게 가서 빈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물으려는 찰나 아저씨는 어딘가로 사라져 착륙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오른쪽에 앉아있던 청년도 다른 빈좌석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양옆 좌석이 비어 아홉 시간을 누워갈 수 있는 행운을 누렸고 그들은 착륙하기 전에 어디선가 나타나 원래 좌석으로 돌아왔다.
특별기내식을 신청하면 스튜어디스가 명단을 들고 와 이름과 기내식을 확인한다. 그리고 남들보다 훨씬 빨리 음식을 제공받는다. 15분 정도 먼저 나온 기내식을 먹고 있으면 특별 대접받는 것 같은 기분에 밥맛도 좋아진다. 식사 후 화장실을 가기 위해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건 덤이다.
첫 기내식으로 신청한 생과일식으로 라즈베리와 블루베리, 멜론, 수박이 나왔다. 과일들은 냉장고에서 막 꺼낸 듯 신선도를 잘 유지해 혀끝에 닿는 온도가 기분 좋게 차가웠다. 상큼한 과일들을 행복해하며 먹고 나자 디저트를 나눠주셨는데 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M 아이스크림 바가 나와 고민하다 되돌려드렸다. 비건으로 살면서 종종 유혹에 흔들려 신념을 저버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피부 트러블이 일어나면 그제야 정신 차리고 다시 순수자연식으로 돌아갔다. 여드름이 바가지로 나서 고생하던 20대에 채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후회를 하곤 한다. 동물성 식품이 내 피부에 독이었음을 그때 알았더라면 피부 고민을 덜했을 텐데 안타깝다. 8년 전 고기를 끊어도 피부트러블은 종종 일어났는데 독하게 마음먹고 유제품까지 끊어버리자 여드름은 물론 피부 가려움증까지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여전히 얼굴에 개기름은 번들거려도 여드름이 나지 않아 신기하기만 하다. 비건이 된 후로 어려 보이고 피부 좋다는 소리까지 듣게 된 건 보너스다.
양옆의 남자들이 사라진 덕에 발 뻗고 드러누워 실컷 자고 일어나니 두 번째 기내식이 나왔는데 이번엔 더 푸짐한 과일식이 등장했다. 한 끼만 과일식으로 신청한 줄 알았는데 두 끼 다 과일로 나와서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순응하고 뚜껑을 연뒤 흡입을 시작했다.
흠없이 예쁜 모양으로 잘 익은 새빨간 딸기는 꼭지 없이 반이 갈라 나와 먹기 편했고 깜짝 놀랄 만큼 상큼한 맛이 자다 일어나 몽롱한 정신을 차리게 만들기 충분할 만큼 일품이었다. 포도, 파인애플, 멜론(주황, 연두) 그리고 따끈한 빵 한쪽을 받아먹고 있으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다.
과일을 내가 직접 손질하지 않고 앉아서 입만 벌려 넣으면 되는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더없이 좋았다. 주문한 자몽주스는 설탕이 너무 들어간 인위적인 맛에 차마 다 마시지는 못했다. 과일 본연의 자연스러운 맛을 즐기다 첨가물이 들어간 가공식품 맛을 보니 민감한 혀와 목구멍에서 살짝 거부감이 올라왔다.
원래 공짜술이라면 환장하는 인간이라 비행기만 타면 맥주를 꼭 마셨지만 안 그래도 건조한 기내에서 피부를 더 건조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마시는 걸 참았다. 음주 후 알코올의 이뇨 작용과 분해 과정에서 체내 수분이 급격히 빠져나가 피부가 매우 건조하고 푸석해진다는 얘길 들은 후부터 기내에서 술은 자제 중이다.
물 대여섯 잔과 자몽주스 반잔 그리고 과일식 두 끼로 9시간 넘는 거리를 버티고 나니 눕거나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도 소화가 잘 돼 위가 부대끼지 않아 몸이 가뿐했다. 긴 비행시간으로 생기는 시차부적응(Jet lag)은 여행자의 심신을 물먹은 휴지상태처럼 축 처지게 만든다. 언젠가 우연히 웹서핑을 하다 제트래그를 막을 수 있는 신박한 방법을 알아냈는데 기내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16시간 동안 단식하며(물은 양껏 마셔도 된다) 도착한 나라에서 아침식사로 첫끼를 먹으면 신기하게도 제트래그를 못 느낀다고 한다. 기내식을 거부하기엔 식탐이 많아 아직 시도는 못해봤지만 꼭 한번 실험해 볼 생각이다. 건강에 좋은 단식도 하고 시차적응도 잘한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드디어 거의 열 시간이 걸린 첫 번째 비행이 끝나고 한 시간을 경유한 광저우에서 방콕으로 가는 기내에서는 흑미가 섞인 뜨끈뜨끈한 쌀밥과 카레 비슷한 것이 나왔다. 종일 과일만 먹었더니 배가 고파 첫술을 급하게 뜨다 혀가 홀랑 데어 결국 0.1초 만에 뱉어냈지만 식을 때까지 못 기다리고 밥에 얹어 쓱쓱 비벼 먹었다. 토마토, 병아리콩, 강낭콩이 들어간 걸쭉한 카레는 입맛에 맞았고 옥수수와 양상추, 강낭콩 샐러드, 껍질 벗긴 용과와 멜론, 작은 빵 그리고 찐 단호박 한 조각과 정체 모를 연두색 채소가 곁들여 나온 식사는 양이 적은 것을 빼면 제법 훌륭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기내식은 너무 양이 적다.
내 옆자리 금발여인도 비건인지 같은 걸 먹었는데 흥미롭게도 그녀는 음료를 주문할 때 유창한 중국어를 했다. 그런데도 중국인 스튜어디스는 금세 까먹고 비행하는 세 시간 내내 중국말을 구사하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영어로 얘기하고 중국어 1도 모르는 내겐 중국말로 계속 말을 걸었다. 뭔가 이상하면서 재밌는 상황이었다.
중국에서 오래 산 것 같은 그녀가 고기요리 천국인 중국에서 비건으로 사는 게 어떤지 너무나 궁금해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고 있어 방해하기 곤란했다. 그러다 화장실에 다녀오며 일어나 달라고 양해를 구할 때 눈을 뜬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신비롭게 빛나는 푸른 눈에는 친절함과 푸근한 공감능력이 담겨있는 듯했다. 무엇보다 공감능력이 있어야 채식이 가능하니까.
기내식으로 비건식사를 하면
1. 남들보다 일찍 받아먹는다. 보통 15-20분 먼저 제공받는다.
2. 움직임 없이 앉아서 사육당하며 비행하느라 위가 부대끼고 소화가 힘들다면 과일식을 추천한다. 소화가 잘 되고 몸이 가벼워져 여독이 덜하다. 여행이 한결 즐거워지고 이동시간 동안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기내식을 적게 먹을수록 시차 적응을 쉽게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3. 좌석을 좋은 곳으로 배정받을 확률이 높다. 이건 케바케.
4. 상공에서 실천하는 동물사랑, 환경보호, 건강지킴이 채식으로 여행길이 더 보람차고 뿌듯해진다.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닌 내가 더 좋아져 자존감이 높아진다.
5. 좁아터진 기내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다음 승객에게 민폐를 덜 끼치게 된다. 고기를 먹은 후의 대변은 냄새가 고약하다. 반면 채식주의자의 변은 토끼나 말의 똥처럼 덜 역하다. 육식동물(개, 고양이)의 변은 정말이지 대환장 냄새파티다. 육식을 즐기던 나의 경험에 의하면 비건인 현재 큰일 보는 일이 즐거워졌다. 냄새는 물론 변비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들은 치앙마이, 빠이, 방콕에서 먹은 채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