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17
사람 17
문득, 그러나 앞으로도 오래, 떠올릴 때마다 내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고 어깨에 비단 너울을 드리워 아름답고 선한 표정을 갖게 해 줄 할머니를 알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야. 세상에서 제일 고운 사람이야. 세상에서 내가 네일 좋아하는 사람이야. 세상에서 나랑 제일 친한 사람이야. 공주야. 공주님이야.”
애자 할머니! 실습했던 요양병원에서 만난 할머니다. 노인성 치매로 돌볼 가족이 마땅치 않아 입원했다고 했다. 포항에 사는 딸이 서울에 할머니의 여동생인 이모가 병원 부근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멀리 서울까지 모셔와 입원시켰다고 들었다.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애자 할머니는 웃을 때는 온 얼굴로 웃었다. 오래 누워 계시느라 거동은 못하셨지만 웃음만큼은 시간이 갈수록 진화되는 아기 같은 할머니였다. 처음엔 입술 끝이 약간 올라갈 둥 말 둥 웃으시는 건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도통 분간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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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습 780 시간을 채워나가는 동안 할머니는 입술은 물론이고 뺨으로, 콧잔등으로, 양 미간으로, 이마까지 온 얼굴로 웃는 기적을 보여 주셨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로 흐트러지려는 나를 바로 잡아 주는 귀한 기억이 되고 있다.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실습을 했던 나는 애자 할머니의 점심 식사 케어를 했었다. 물론 누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너무도 작고 마른 애자 할머니에게 첫눈에 마음이 갔다는 게 아마 동기일 것이다. 게다가 늘 병실 문 쪽으로 돌아누워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긴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는 것도 동기를 더하는 이유일 것이다.
바로 아래 3층에 계시는 어머니! 실습 전에도 거의 매일 어머니를 뵈러 갔었고, 실습을 어머니가 계시는 병원에서 한 이유도 매일 어머니를 보고, 또 내가 같은 병원에 있다는 것이 어머니께 든든한 힘이 될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십사 시간을 곁에만 있을 수 없는 딸을 기다리는 동안, 내 어머니도 애자 할머니 같은 시간을 살고, 견디고, 계셨을 것이다.
그래서, 애자 할머니의 기다림이 가득한 눈은 내 어머니의 눈이 되어 나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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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이 끝나는 날, 병실마다 작별인사를 드리다 마지막으로 애자 할머니를 뵈러 갔다.
“이상해. 이상해.”
누워 계신 할머니를 목 밑으로 팔을 넣어 꼭 끌어안는 내 귀에 할머니의 웃음 기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왜요? 뭐가 이상해요?”
“공주님, 내 공주님. 어디 가?”
그때 그 병실 간병인이 뭘 다 아시나 보다 하더니 할머니 옆으로 다가왔다.
“애자 어르신, 우리 학생 선생님 이제 실습 끝났어요. 이제 안 와. 어쩌누? 우리 애자 할머니 공주님 못 봐서.”
“그렇지? 이제 안 오지? 봐, 내가 다 알지.”
할머니를 안고 있는 팔부터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귀까지 저릿한 습기가 차오르는데 수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간호 일을 하는 사람은 절대 환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그녀는 늘 말했었다.
“애자 어르신, 공주는 많아. 여기 다 공주잖아?”
그러더니 나에게 손짓을 했다.
“학생 샘, 어서 나가요. 그나저나 학생 샘 안 오면 할머니 또 밥 안 드시겠다고 도리질만 하실까 걱정되네.”
나는 그렇게 애자 할머니를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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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떠먹여 드리면 다 빠진 이빨로 잇몸으로만 오물오물 씹으시다가 밥알이 흘러내리는데도 말을 하시던 할머니. 온 얼굴로 웃는 웃음이 그대로 내 마음속에 들어와 환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환한 공간에서 어느덧 나는 공주가 되어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야. 세상에서 제일 고운 사람이야. 세상에서 내가 네일 좋아하는 사람이야. 세상에서 나랑 제일 친한 사람이야. 공주야. 공주님이야.”
간호 주무사로 일한 지 삼 년이 가까워오는 지금, 애자 할머니의 공주님은 어디 갔을까?
가끔, 아니 자주 생각한다.
우리 병동에 계신 어른들께 기적 같은 맑은 정신 일 분이 주어진다면 과연 몇 분이나 내게 고맙다는 말씀을 하실까? 공주라고는 불러주시지 않더라도 과연 몇 분이나 고맙다고 손을 잡아 주실까?
한 분도 없을 거라는 대답이 나오는 내 양심이 부끄럽고 죄스럽다. 알게 모르게 이미 타성에 젖은 지금의 내 모습에 연일 마음이 볶임을 숨길 재간이 없다.
‘내 어머니가 받고 싶은 간호, 내 어머니에게 이렇게 해 주면 좋겠다고 보호자로서 생각해 왔던 것을, 내가 하리라. 내가 해 드리리라.’ 그것이 간호조무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할 때 내 의지였고, 포부였고 각오였다.
학원 동기들이 긴 실습 기간에 불평불만과 후회를 반복하다가 겨우 780시간을 채우는 날, 딱 그 시간에서 멈추고 미련 없이 나갈 때도, 나는 네 시간을 더 한 뒤 평소대로 다섯 시까지 병동에 남아 일을 했었다. 그런 후에도 실습 확인서를 받아 병동을 나오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고 자꾸 돌아봐졌다.
그만큼 나는 늙고 병들고 외로운 노인들 곁에 있는 나를 사랑했다. 천직인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다 참을 수 있었다. 직급이 엄연히 다른 간호사들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 자존심의 상처도, 간호사도 아니고 요양보호사도 아닌 어정쩡한 입지가 주는 외로움도, 늙고 병든 환자들에게서 날 수밖에 없는 몸 냄새와 그들이 쏟아내는 오물 냄새도 다 참을 수 있었다. 주변 지인들 하나 같이 신기하다는 말을 거듭하며 나를 멈추게 하려고 애썼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언제부턴가 거의 매일 하는 생각이 있다.
‘이 일을 하는 날 수만큼 나는 죄를 짓는다!’
드러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인지기능을 상실한 노인들에게 나는 지쳐 갔고 하대와 욕설을 들을 때는 화가 났다. 실습 때는 어르신들이 갑자기 왈칵 쏟아내는 가래도 맨손으로 받아냈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놀라면 손은 씻으면 된다고 했던 나였다.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더럽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본다. 환자한테 상식과 경우를 들먹이며 따지고 싶어 하는 나를 본다. 자기들끼리는 친절하게 웃다가도 조무사들에게는 상하관계임을 드러내는 엄격한 표정으로 대하는 간호사들에게 대들고 싶어 하는 나를 본다. 그러다가 자청해서 들어온 노인 요양병원을 살아서 보는 ‘연옥’이라며 진저리 치고 있는 나를 본다.
나는 애자 할머니의 공주였는데... 애자 할머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제일 곱고, 제일 친하며, 제일 고마운 공주라고 하셨는데... 말이다.
할머니가 아직 세상에 계시는지 떠나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 할머니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애자 할머니, 할머니가 제 공주랍니다. 저도 할머니의 영원한 공주가 될 수 있도록 그때의 저로 돌려세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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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용기이자 죄에 대한 보속이다. 애자 할머니를 생각하다가 내 마음속 아수라장을 적나라하게 만난 이 시간, 반성과 새로운 다짐이란 선물을 할머니께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