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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서석화 Jun 28. 2019

왜 걱정이 없냐고 물었더니...

 

KO 패였다. 솜털만큼의 반론도 제기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패배였다. 졌다! 그런데 기분 좋다!      

평생 다 쓰지도 못할 거액의 상금을 받은 것만큼 온 세상이 반짝인다. 백만 명의 호위무사가 천 겹의 띠를 두르고 지켜주는 것만큼 안전한 곳에 착륙한 것 같다. 그랬다. 폭우도, 번개도, 산발한 여자의 엉킨 머리 같은 눈보라도 없는, 내 머릿속 어떤 나라가 나타났다.          



긴장되고 꼬였던 몸 안의 핏줄이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게 죽 늘어난다.     


“한 달씩만 살아요. 원래는 하루씩만 살았어요. 그러다 직장을 잡았어요. 이제 월급을 받잖아요. 왜 대다수 직장에서 월급으로 임금을 줄까요? 그건 한 달씩 살라는 거예요. 일 년 후, 십 년 후를 지금부터 살기에는 너무 멀잖아요. 미래는 신의 영역이니까 미리 알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서 저는 한 달씩 살아가요. 한 달 한 달 꾸역꾸역 살았더니 불안했던 일 년 후도, 십 년 후도 어느새 지나가 과거가 돼 있더라고요. 그러니 걱정, 없어요. 선배는 멀리 생각하니까, 신의 영역을 넘보니까 불안하고 무서운 거예요.”     


남편도 없고, 집도 없고, 든든한 재력의 친정도 없는 후배의 명쾌한 대답이다. 가진 건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월급이 나오는 소박한 직장, 그리고 남쪽 바람 같은 다정한 아들 하나. 나이는 들어가는데 미래가 막막하고 불안하지 않냐는 내 물음에, 그녀는 전혀 막막하지 않은 얼굴로, 불안이란 단어도 모르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명쾌한 데다 빼어난 지혜로움까지 느껴지는 후배를 아마 나는, 그때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그래서일 것이다. 마음속에서 그녀의 말에 호응하고 힘을 실어줄 다음 말들이 두런거리며 만들어지고 있었다.     


©픽사베이


그래. 그걸 몰랐구나. 생각조차 못했구나. 미래는 우리가 모르는 저 멀리 아득한 무엇이 아니라, 매 시간 다가와 어제로 흘러가는 ‘지금’의 발자취라는 걸!      



어느 지점에 고정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낯선 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다가와 우리와 살고 있고 그렇게 흘러가는 게 ‘미래’라는 걸!      



모르는 시간, 모르는 지점을 ‘미래’라는 허구에 매어놓고 불안해했는데, 이미 우리는 미래에 대해 살아온 날수만큼 경험이 쌓였다는 걸!     



별 거 아니었구나. 막막할 것도, 불안할 것도 없구나. 오고 간 게 미래였고, 그렇게 우리는 이미 수많은 미래를 살아냈으니 말이다. 오늘, 지금 이 시간이야말로 미래의 출발점이자 도착지구나!     



한 달씩 산다는 후배에게 깔끔하게 패배하고 장렬하게 백기를 던진 어느 날이었다. 돌아보는 사방에 햇빛이 쨍했다.      


살고 있고, 살 수 있고, 살아낼 미래가 ‘지금’이라는 팻말을 들고, 내 안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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