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 패였다. 솜털만큼의 반론도 제기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패배였다. 졌다! 그런데 기분 좋다!
평생 다 쓰지도 못할 거액의 상금을 받은 것만큼 온 세상이 반짝인다. 백만 명의 호위무사가 천 겹의 띠를 두르고 지켜주는 것만큼 안전한 곳에 착륙한 것 같다. 그랬다. 폭우도, 번개도, 산발한 여자의 엉킨 머리 같은 눈보라도 없는, 내 머릿속 어떤 나라가 나타났다.
긴장되고 꼬였던 몸 안의 핏줄이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게 죽 늘어난다.
남편도 없고, 집도 없고, 든든한 재력의 친정도 없는 후배의 명쾌한 대답이다. 가진 건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월급이 나오는 소박한 직장, 그리고 남쪽 바람 같은 다정한 아들 하나. 나이는 들어가는데 미래가 막막하고 불안하지 않냐는 내 물음에, 그녀는 전혀 막막하지 않은 얼굴로, 불안이란 단어도 모르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명쾌한 데다 빼어난 지혜로움까지 느껴지는 후배를 아마 나는, 그때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그래서일 것이다. 마음속에서 그녀의 말에 호응하고 힘을 실어줄 다음 말들이 두런거리며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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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씩 산다는 후배에게 깔끔하게 패배하고 장렬하게 백기를 던진 어느 날이었다. 돌아보는 사방에 햇빛이 쨍했다.
살고 있고, 살 수 있고, 살아낼 미래가 ‘지금’이라는 팻말을 들고, 내 안으로 입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