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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서석화 Aug 06. 2019

아프지 말거래이, 너무 오래 살지도 말거래이.

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48

사람 48     

                아프지 말거래이, 너무 오래 살지도 말거래이.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내 가슴에 대었다. 겨울 나뭇가지 같은 앙상한 할아버지의 손가락이 내 손바닥 안에 얌전하게 들어 있다.      


“이런, 또 운다. 와? 내가 죽을까 봐 그라나? 이래 마음이 약해 우째 환자 간호하고 돌보노?”     


내가 할아버지 손을 감싸고 있는 건지, 할아버지가 내 두 손을 붙잡고 있는 건지 도 분간이 안 되는 시간에 내가 또 있다.     


“선생이 너무 약해 보여 늘 맴이 쓰이더라.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이 일보다는 편한 일을 해야 될 사람인데... 뭐했던 사람이고? 선생질 했나? 늙으면 앉아서 천 리를 본다고, 선생 몸 테나 말 테나 사농공상士農工商 중에 사士 같은 기라. 맞제? 그런데 와 병자 간호 질 하노?”     


할아버지의 손이 따뜻하다. 앙상한 손 마디마디에서 푸른 이파리들이 돋아나는 것 같다. 삽시간에 가슴에 푸른 녹음이 자욱하다.     


“몸 테도 말 테도 고운 사람이 맨날 피 보고, 고름 보고, 정신 줄 놓은 양반들 악다구니 받고, 한시도 앉을 여가 없이 새 다리 같은 다리로 종종거리는 거 보믄, 안씨러버 못 보겠더마. 와? 돈 벌어야 되나? 그래보이지는 않는데... 니 아프면 다 끝난데이. 사람은 지 단도리가 최곤기라.”     


©픽사베이



정의홍 어르신, 구십 세, 상세불명의 복합 질환으로 한 달 전 입원했다. 두 살 연상인 아내와 동반 입원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중환자 병동으로 입원했다. 상세불명의 복합 질환이라는 것은 할아버지와 같았으나 상태가 위중했기 때문이었다.      


“여 와 보니까 진짜 사람만큼 질긴 생명도 없다 싶다. 누가 그랬노?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영장? 이렇게 지 맘대로 죽지도 못하는데 이기 무슨 영장이고? 택도 없는 소리제. 그라고 그 뭐고? 제목 참 웃긴 노래 안 있나? 아, 인자 생각난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뭐 그런 노래.”     


멜로디가 들려오는 것 같다. 밝고 활기차고, 긍정적인 가사가 이미 온 몸에 퍼지고 있다.     


“늙어보지도 않고, 병들어보지도 않은 젊은 것들이, 만들고 부른 그 노래 말이다. 그거 새빨간 거짓말 아이가? 우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노? 늙고 병들면 사람만큼 더럽고 추잡은 짐승도 없대이. 영장은커녕 사람만큼 불쌍한 짐승도 없단 말이다.”     


남은 할아버지 왼 손마저 끌어올려 가슴에 안는다.      



“뭐 할라꼬 늙은이 손을 자꾸 만지노? 니는 우리가 안 더럽나? 늙으면 지 냄새에 지가 놀라는 법이데이. 자식들도 찡그린다 아이가. 니가 이카니가 자꾸 남달라 보이는기라. 야는 진심이대이... 야는 진짜로 이카는기대이... 야는 대체 누굴꼬? 우째 여기에 이런 아가 있노... 맨날 생각하는기라. 니 무슨 속사정 있제? 혹시 부모님이 이런 데 계시나? 그래서 부모 생각나서 그라나?”     


©픽사베이


어머니가 요양병원에서 떠나셨고, 그래서 나도 다른 어르신들한테 내 어머니가 받은 이곳 사람들의 정성을 베풀고 싶었다고, 그리고 내 어머니의 숨은 말과 어머니가 견딘 시간을 받아 적듯, 이곳 어르신들의 숨은 말, 남은 시간을 받아 적어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나는 말하지 못한다.     


“혹시 그기 맞다믄, 부모를 요양병원에 모셨다고 맘 쓰려 하지 말거래이. 그건 잘한 일인기라. 늙으면 지 몸도 지가 못 씻는데, 마누라고 남편은 같이 늙었으니 힘 빠져 못 씻겨주고, 아들이고 딸이고 며느리고 자식들은 씻겨준대도 민망해서 또 못 맡기는기라. 그런데 여기 오니 간병하시는 저 여사님들이 얼마나 잘 씻겨주는지, 마 몸이 펄펄 날아가는 것 같더래이. 늙고 병들면 그래서 남이 더 편한기라. 핏줄은 건강할 때, 내 몸에서 냄새가 안 날 때까진기라.”     



돌아가실 때까지 휠체어를 타고 간병인과 함께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보셨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화장실에서조차 어쩌다 내가 함께 있으면 나가 있으라고 하셨다. 간병인만 화장실 문 앞을 지킬 수 있었다. 내가 무안해하니까 간병인은 말하곤 했다.     


‘할머니, 딸인데 어때요?’     


어머니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딸이니까, 뭐 하러 딸한테 에미 용변 보는 거 보여요?’     

어머니의 말이 의홍 할아버지의 말과, 어머니의 목소리가 의홍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어머니의 마음이 의홍 할아버지의 마음과 섞인다.      


어머니 가신지 삼 년이 되었지만 어머니의 시간은 그대로다. 어머니의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 병원 어르신들을 보며 나도 흘러가지 못한 그때의 시간을 산다. 아니, 흘러가지 못하게 그때의 시간을 붙잡는다.      


©픽사베이


기억은, 정면에서 마주할 때 정직한 순도로 우리를 데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병실을 나오려고 의홍 할아버지 손을 가만히 침대에 내려놓는데 할아버지가 말간 눈으로 나를 본다.      


“할아버지, 좀 주무세요. 여덟 시에 혈당 체크하러 올게요.”     


그런데 발길이 붙잡힌다. 붙잡힌 발등 위로 기어코 눈물이 또 떨어진다.     


“아프지 말거래이. 너무 오래 살지도 말거래이. 니는 딱 예쁘게만 살거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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