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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서석화 May 18. 2020

나는 어떻게, 불쑥, 떠오르는 사람이 될까

이런 조우! 티끌만큼의 암시도, 갑자기 떠올라 휘청거렸던 1초도 없었는데, 그녀가 불쑥 떠올랐다. 책장 정리를 하다가 눈에 뜨인 낡은 시집 때문이었다. 초록색 하드보드지 표지엔 ‘릴케 시집’이란 제목이 금박으로 쓰여 있다. 종이가 하도 누렇게 변해 발행일을 보니 거슬러 계산하기도 힘든 1974년이다. 정가 400원. 1974년과 400원이란 숫자가 인식되자 아주 잠깐 숨이 멎는 것 같다.      


장미와 불안과 고독, 사랑과 두이노 성과 파도와 천사를 그녀는 말했었다. 릴케라는 이름은 루 살로메와, 러시아와, 절대자와 함께, 당시 내겐 아름다움의 극한이었다. 그때 받은 선물이었다. 받을 당시 그녀가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것이라는 설명 때문에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에 얹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녀는 지금 세상에 없다. 나는 그녀의 영정이 맞이해주던 장례식장에서 그녀의 죽음을 확인했다. 두 번 절을 하는 동안 그녀의 명복을 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녀가 가만가만 들려주던 릴케의 묘비명을 생각했던 건 분명하다. 릴케 자신이 죽기 전 미리 마련해 놓았다는 그것! 장미꽃을 따다가 장미 가시에 찔린 상처가 백혈병을 일으켜 죽은, 그래서 죽음마저도 시가 된 시인 릴케. 그의 묘비명.         


©픽사베이     


-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즐거움이여-     


그리고, 솔직히 잊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가 불쑥 떠올라 하루 종일 나를 그때의 시간에 서게 한다. 한 권의 책 때문이다. 한 사람의 청춘과 그 시간의 손때가 묻은 책을 내가 갖게 됐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릴케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나는 생전에 자동차에 미등이 켜지는 시간과 가로등에 불 들어오는 시간을 못 견뎌했던 그녀를 기억해낸다. 회상의 동기가 한 권의 시집이라는 것이 오늘 이 하루가 저물도록 왜 이렇게나 아름다운가. 그녀가 부럽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다. 아직 만으로 육십 년도 못 살았는데, 뻥튀기 좋아하는 세상은 아직도 사십 년이나 더 살아야 한다는데, 아는 이가 점점 적어진다. 그들은 각자가 내밀 수 있는 최고의 이유로 자신의 떠남을 합리화했다. 아파서와 늙어서가 물론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아프고 불편한 다른 이유들도 분명 존재했다. 신기했던 건 들을 때마다 믿어졌다는 것이다. 그냥, 고개가 끄덕여졌다는 것이다.      


죽음은 그런 거였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믿을 수밖에 없는 것! 여지도 재고도 없는 냉정한 사실! 상상으로라도 돌이킬 엄두조차 불가능한 것! 그래서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는 사람들은 울고 침묵하고 칩거했다. 그러면서 세월에 기대 잊어갔다. 그리고 망각의 미안함을 순리라고 말하는 것으로 덮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오늘처럼 불쑥, 떠오르는 사람을 보며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왜일까? 신기하고도 두렵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다 갔는지에 따라,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있다 갔는지에 따라, 어느 날 누군가에게 불쑥 떠오를 때의 느낌은 다를 것이다. 그녀는 초록 표지 릴케 시집으로 불쑥 내게 왔다 갔다. 릴케라는 이름만으로도 나는 온종일 장미향을 맡았다. 그리고 완성하기까지 십 년이 걸렸다는 “뉘라서 내 울부짖음을 들어줄까”로 시작하는 아프고도 아름다운 두이노의 비가를 다시 읽었다. 시집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꼼꼼하게 눈으로 손으로 더듬어가며 읽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내게 오기 전 그녀의 눈이 머물고 손이 스쳤을 책이라는 게 처음으로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반갑고 고마웠다. 그리고 그녀의 부재가 진심으로 슬펐다.      

나는 훗날에 나와 인연 맺었던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어떻게 다녀올까? 사람들은 어떨 때 나를 불쑥 생각해줄까? 무엇으로 그들은 나를 안다고 해 줄까? 불쑥 떠오르는 내가 그들에겐 어떨까?     


©픽사베이     


자신이 남기고 가는 자취는 정직하다. 집안을 돌아다니면서도 자꾸 뒤가 돌아봐지고, 내 그림자 길이를 거푸 재보는 하루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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