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과거의 행동들이 날 여기로 이끈 거라면?
영화 끝부분에 독백처럼 말하는 대사다. 영화 <와일드>는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빠와 이혼 후 뒤늦게 자신을 길을 가던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길을 잃어버린 딸이 PCT(Pacific Crest Trail)를 걷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라 더욱 힘이 있다. 로드무비라 할 수 있는 영화인데 로드무비엔 항상 인생과 자신에 대한 깊은 탐구가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삶이라고 하지만 "한 번도 내 운전석에 앉아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엄마처럼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채로 살거나, PCT를 걷는 중간에 만난 먹을 것과 잠 잘 곳을 제공했던 아저씨가 "내 인생의 분기점 같은 것은 없었거든요.”라고 했던 것처럼 그냥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다.
PCT(Pacific Crest Trail)는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에 이르는 4,200km의 트레킹 코스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 10번은 해야 하는 거리이고 3~6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며 참여자 중 절반 정도만 성공한다고 한다. 『나는 걷는다』의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실크로드를 걸었다.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에 부딪히며 걷는다. 인간은 한계에 도전하길 멈추지 않는다. 그 과정은 결코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도전에 성공하면서 얻는 성취감은 어떤 성취감보다 크고 강력하다. 아마 그 과정이 험난했기에 더 강력하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도 셰릴 스트레이드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길을 떠났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아내를, 셰릴 스크레이드는 엄마였다. 그 순간이 삶의 분기점이 되었다. 그래서 인생의 분기점이 없었다는 건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도 된다. 나는 두 사람처럼 먼 길을 오래 걷지는 않았지만 제주도를 비행 청소년과 8박 9일 걸었다. 배낭을 지고 걸었다. 잠자리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묶고 중간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걷는 건 쉽지 않았다. 천종호 판사가 진행하는 ‘2인3각’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아들의 학교폭력 가해자 사건을 겪으며 학교폭력 상담을 하며 만난 청소년들을 생각하며 멘토로 지원했다. 혼자 걷기와는 다르지만 생판 모르는 남과 걸으며, 힘들다고, 걷지 못하겠다고 투정하는 아이를 달래가며 걷는 건 또 다른 나와의 갈등이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 이후 엉망으로 살았다. 자신을 돌보지도 않고 마약과 무분별한 섹스까지.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하고... PCT를 걸으며 발톱이 빠지고 온몸에 물집이 생기는 육체적인 고통과 길에서 만난 남자들에게 느낀 위협과 공포가 있었다. 중간중간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도 나오는 데 끝에 나오는 독백인 ‘내 과거의 행동들이 나를 여기로 이끈 거라면?‘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현재는 무수히 많은 과거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누구 때문도, 어떤 상황 때문도 아닌 자신이 만든 것이다. 엄마의 죽음은 엄마도 본인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인데 그것에 붙들려서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내버려 뒀다.
우리는 무언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남탓, 환경탓을 하고 싶어진다. 그도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 과연 그럴까? 사람마다 다를 거다. 어떤 사람은 계속 탓만 하면서 혹은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사람은 살아가다 길을 잃을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그럴 때 당장 무엇을 할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보는 건 어떨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멈춰서 나만의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다. 누군 걷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 스승을 찾을 수도 있고, 누군 종교에 의지할 수도 있다.
많은 자기계발서는 ’계속 무언가를 하라‘고 한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하라고. 한때는 승자와 패자라고 구분 지어서 이러면 패자다 그러니 계속하라고 했다. 산업사회 이래로 게으름은 악이었다. 이젠 게으름을 즐기며 생활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시간이 현대인에게 필수다. 시청 앞 광장에서 멍때리기 대회도 열리는 시대이니. 오늘은 어떤 멍을 해볼까. 추운 겨울이면 불멍을, 더위가 기승일 땐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늘어져 있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