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슬픔을 어떻게 이겨내십니까? 타인의 슬픔을 잠재우는 방법이 궁금해진 저는 저와 친한 곱슬머리 그(남자친구, ESTP)를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슬프다는 말을 저에게 한 적이 없습니다. 서글픈 감정보다는 억울할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그는 스트레스가 쌓여도 스포츠 등을 보고 최대한 털어내고 다음날에는 슬픔을 잊은 듯이 행동합니다. 진짜 잊었을 수도 있고요.
슬픔은 수용성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죠. 수용성, 즉 물에 녹는다는 뜻으로 샤워하거나 눈물을 펑펑 흘려서 이때 몸을 적시는 물로 슬픔을 사그라뜨릴 수 있습니다. 저도 힘들 때 시원하게 목욕하거나 러닝머신을 뛰면서 땀을 흘리는데요. 실은 꺼이꺼이 울 때도 많습니다.
1. 눈물 흘리기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일부러 눈물을 빼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눈물 빼내기에는 패턴이 있더군요. 첫 번째, 슬픈 일이 있으면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입니다. 두 번째, 저를 울게 한 무언가를 떠올립니다. 책, 드라마, 영화 속 누군가가 가여워서 울었든, 감동을 주어서 울었든 울게 한 이유는 크게 상관없고 그저 눈물을 빼게 한 콘텐츠라면 다시 틀어서 감상합니다.
세 번째, 유튜브에 '떠나려고 하는 모든 이에게'를 검색하여 현재 기준 1,346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한 한 영상을 봅니다. 하늘을 나는 새와 하나의 음악만 반복해서 나오는 영상. 단순하지만 이 영상의 백미는 댓글인데요. 서로를 토닥이는 수많은 댓글이 지금도 이어져 저도 위로받곤 합니다. 네 번째, 이쯤이면 세상 모든 일에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됩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배우 고 이선균이 내뱉는 위로를 듣다가 '이선균 같은 연기 잘하는 배우가 죽다니!' 등 온갖 이유를 찾아내어서 눈물을 흘립니다. 다섯 번째, 다음 날 일어나서 정신을 차립니다. '내가 나를 괴롭히던 그 일 때문에 그렇게까지 슬퍼할 이유가 있었나??' 이렇게 생각하면서요.
2. 텍스트로 도망치기
슬픔을 물로 녹인 후에는 책, 인스타그램, X(트위터), 카페 등 텍스트가 있는 곳으로 도망칩니다. 텍스트로 도망치는 이유는 텍스트가 현실의 문제에 매몰되지 않게 해주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에요. 인간 또는 일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제가 책에서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샌드위치를 먹어도 될지 고민하는 철학적인 내용이나, 사회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에 관한 내용을 읽습니다. 읽다 보면 제가 고민하던 문제가 사사롭게 느껴집니다. 인간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텍스트가 쏟아지는 또 하나의 공간, SNS. 번아웃에 취약한 사람을 위한 팁, 소설가 한강의 작품 속 미친 어휘 모음, 언젠가 세상을 번역하겠다는 유명 영화 번역가의 글, 나를 지킬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의 특징을 저는 SNS 내 보관함에 저장해두었네요. 긴 시간 넓게 보아야 마음에 오래 남는 것도 분명히 있거늘 그저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 위해 '미친' 등의 어휘를 사용한 게시물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저 또한 목표를 공고히 하거나 슬픔을 없앨 때는 SNS를 즉효 약처럼 활용합니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인스타그램에서는 그림에 텍스트를 작성한 게시물이 자주 보이고 X(트위터)에서는 짧은 단문, 즉 짧기에 한눈에 마음을 사로잡는 강렬한 문구가 많습니다. 책을 이용해 현실의 문제에서 한 발짝 벗어났다면 SNS에서는 짧은 표현을 통해 더 충만한 삶을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팁을 얻어 갑니다.이따금 드나드는 심리 카페에도 들어가 봅니다. 카페에는 밖에서는 보기 힘들던 저와 같은 MBTI(INFJ), N인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밖에서는 좀처럼 안 보이던데 다들 어디 있으셨나요? 질문하고 나니 저도 지금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쯤에서 눈치채셨을까요. 슬플 때 내향인인 저는 혼자 있습니다. 삼십 대가 지나니 바빠서 술자리를 가질 시간이 더 적어지고 오래된 친구와도 관심사가 달라져 깊은 이야기는 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술자리에서 제 고민을 말해서 어쩔 건데요. 언니, 언니가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래도 더 좋은 인연들을 찾길 바라는 내향인이지만...
얼마 전 곱슬머리 그의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이날 너무 긴장하면 리액션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긴장할 것이 분명했기에 우황청심원까지 챙겨 먹고 갔거늘, 너무 긴장한 나머지 평소에 자부하던 야무진 리액션조차 안 나오고 웃기만 하다가 왔어요. 남자친구네 부모님이 많이 먹으라고 해주시는데 손이 떨려서 처음에 젓가락을 못 쥘 정도였다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멋있는 남자친구, 미지의 남자친구네 부모님, 옆쪽으로 보이는 낙동강의 편안한 풍경, 눈앞에 놓인 식욕을 자극하는 생선 요리는 안타깝게도 제 긴장을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먹방이었는지 저는 그날 후식으로 나온 밤까지 알차게 다 먹는 먹방러가 되었습니다.
둘이 있을 때 "근데 너 너무 조용한 거 아냐?"라고 얄밉게 말하며 또 저에게 장난칠 준비를 하는 곱슬머리 그에게는 우리 집에 왔을 때 두고 보자고 맞받아쳤습니다.
며칠 후 곱슬머리 그는 제가 고집이 있어 보였다는 말을 부모님 중 한 분이 흘리듯이 했다고 말했습니다. "아! 이 말은 너한테 안 해야 하는데! 근데 신경 안 써도 돼~."라는 말을 덧붙여서요. 단 한 번 만났고 제 상냥함을 조금도 보여드리지도 못했는데 고집이 있어 보인다니 회사 면접에 망한 지원자처럼 침울해져 있는데, 곱슬머리 그는 '고집'이라는 단어가 재밌었는지 "너는 참 고집이 세네, 깔깔깔." 이러면서 저를 계속 놀리며 불 난 집에 부채질했습니다.
저는 이후 그에게 어떡하냐며 걱정하는 이야기를 수없이 했습니다. 그는 저를 잘 놀리고 저는 똑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두 가지의 공통점은 상대방을 짜증 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겠죠. 곱슬머리 그는 "흘러가며 한 말이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할까", "나는 맞는 말 했다고 생각했다. 깔깔", 끝에는 "너처럼 번역하고 글 쓰는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고집이 있어야 한다."라며 냉탕 또는 온탕 같은 말을 해주었습니다.
이제는 마음이 진정되었지만 처음에는 면접을 말아먹은 취업준비생처럼 울적해져서 또다시 루틴에 따라 눈물을 빼냈는데요. 말 한마디 때문에 혼자 울다니 민망해서 어디에 말도 못 하겠더라고요. 말로 못 해도 글로는 부끄러운 일을 조금 더 표현할 수 있으니 써봅니다. 눈물을 빼낸 다음 날 "내가 왜 그랬지?"라고 당황하며 별일이 아니라고 마음의 정리는 했는데, 문제는 전날 눈물을 흘리면 슬픔은 녹더라도 여파가 다음날까지 이어졌습니다. 눈은 퉁퉁 붓고 잠은 제대로 자지 못해 다음날 컨디션은 엉망이 되더군요. 소중한 다음 날을 눈물로 미리 소모하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슬픔을 이겨내는 법에서 눈물 빼내기를 삭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눈물을 지웠으니 슬픔을 달래는 다른 방법 하나를 찾으면 좋겠죠?
나는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써온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열심히 뉘우치든 어떠한 피난처도, 약속도 주지 않는 황량한 지구로.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2. 텍스트로 도망치기'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주인공은 순간의 선택으로 미래를 생각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듭니다. 어류 학자, 성찰, 눈물, 슬픔 등 과거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파헤치다가, 이윽고 이 모든 일에 마침표를 찍고 자신이 그토록 마주하기 싫었던 지구, 즉 현실에 다시 발을 내려놓습니다.
이 문구가 생각났을 당시 놀랍게도 땅에 발을 디뎌 마음을 안정시키고 현실에 집중하는 인스타그램의 만화도 발견했습니다(@mome_toon). 이 만화에 따르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기 위해 먼저 발을 땅에 단단히 고정합니다. 두 발이 땅에 고정된 느낌에 집중합니다. 그다음 속이 꽉 차게 숨을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 발을 내리누르기로 다짐하고 실제로 발을 내려놓은 감각을 느껴보았습니다. 발 전체에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 느껴지면서 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우뚝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가끔은 현실과 마주하겠다는 결심만으로도 우리는 용기를 얻습니다. 현실에서 동떨어져 슬퍼하고 있더라도 괜찮아요. 우린 돌고 돌아 다시 땅에 발을 붙이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