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들었던 "남의 인생(연애) 사정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왈가불가하면 안 된다"라는 말처럼 저는 어떤 사람의 사랑과 인생을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저 행복해 보이는 사랑도, 인생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닐 수 있으니까요. '잉꼬부부인 줄 알았는데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와 같은 당장 제가 본 연예인 뉴스 기사 헤드라인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러나 누구든지 제가 가장 먼저 쓴 문장에서 뒤쪽으로 부등호(<)가 터져야 합니다. 좋은 연애, 좋죠. 좋은 결혼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일단 내가 좋아야 합니다. 저는 내가 좋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생에서 잃지도, 잊지도 않으려 무던히 자신에게 묻고 답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자신'이 되기 위해 성장은 꼭 필요한 감초입니다. 성장을 통해 얻는 경험으로 더 좋은 자신이 된다고 믿습니다.
제 SNS, 유튜브에는 '이런 생각이 들면 결혼해야 한다', '이러면 결혼하면 안 된다'는 콘텐츠가 알고리즘 때문에 잔뜩 뜹니다. '사귄 지 3개월이 지났을 때 내 마음속에 걸리는 게 없는 사람과 결혼해라', '가장 나답게 있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해라' 등 다양한 의견들이 눈에 들어왔고 곱슬머리 그(남자친구, ESTP)가 이에 해당하는지 고민도 했습니다만, 결국 제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곱슬머리 그와 있으면 성장할 수 있고 그가 저를 굶겨 죽이지는 않겠다는 솔직한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단언컨대 곱슬머리 그는 제가 인생에서 존경해 온 작가, 운동선수, 역사적 인물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제가 존경해 온 이들은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을 향한 사랑을 어렵지 않게 표현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나 또한 이렇게 살아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곱슬머리 그에게는 동일한 이유로 고개를 끄덕인 적은 없습니다. 그가 사랑을 베푸는 범위는 작은 목장의 울타리처럼 넓지 않았고 한눈에 알기 쉬웠으며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울타리 내 존재들을 지켰습니다.
일본어에 이이토코도리(良いとこ取り)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항목 중에서 장점과 이점만을 취한다는 뜻인데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책임을 지지 않고 이익만 취하려는 행동에도 쓰이는 양면성을 지닌 말입니다. 저는 이이토코도리(良いとこ取り)의 좋은 면을 활용해 저와 다른 강점을 지닌 그의 투자 성향, 쿨한 인간관계 등을 사부작사부작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사상, 가치관, 성향 등 뚜껑을 열어 보니 예상보다 저와 다른 점이 더 많아서 놀랐지만, 제 성장의 계기로 삼았어요. 그와 함께하면 앞으로도 제 시야가 한 틈 넓어지고 성장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가 반드시 성장하리라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성장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 저는 그와 처음 만날 때부터, 심지어 지금도 불확실성을 품고 도전 정신을 발휘해야 할 순간을 맞닥뜨리곤 합니다.
더 나아가 곱슬머리 그는 제가 멀리하던 유형과 비슷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요. 과거에 1cm 가까워졌을 때는 결단력 있어 보이지만 더 가까워지면 무례했던 사람들, 1cm 가까워졌을 때는 솔직담백해 보였지만 더 가까워지면 이기적이었던 사람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과 곱슬머리 그가 무엇이 다르길래 무례하고 이기적으로 느껴졌던 타인의 행동이 곱슬머리 그에게서 보였음에도 전혀 미워지지 않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곱슬머리 그의 갈색 눈을 지그시 바라보면 눈동자에 촘촘하게 맺혀 있는 물기 있는 무언가에서, 무례하고 이기적인 언행이라고 느꼈을 때 제가 과거의 타인에게 했듯이 손절하지 않고 "야, 이 악당아!"라며 웃으며 받아치거나 반대로 진지하게 해결하려는 모습에서 사랑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와 함께하면 저와 성격이 다른 사람을 유연하게 대하는 법도 조금이나마 익힐 수 있습니다. 우리의 다른 점은 서로를 과거에서 한 발짝 내딛게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성장의 끝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완벽이 아닌 성숙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타인에게 완벽을 기대하며 불가능한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간단하면서도 아름다운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다.
책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위와 같은 끝내주는 문장을 쓴 저자에게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을 때, 문득 곱슬머리 그의 부족한 부분에 속상해했던 자신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그에게서 완벽을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성장의 끝에는 완벽이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 상대가 완벽해지길 바라면 관계는 망가지기 쉽습니다. 완벽보다는 관계의 성숙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서로에게는 끝없이 성숙한 관계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어려워 보이지만 서로를 이해하면서...
처음 그를 만나서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을 때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곱슬머리 그는 저의 호기심과 도전 정신에 불을 켜주었습니다. 제 방에 있는 스탠드 조명처럼 살짝요. 이전에 사귄 남자들과 다른 분위기를 머금은 외모와 솔직한 말투의 그를 마음에 살짝 들였는데, 머지않아 제 마음에 켜진 불빛은 기름을 부어 활활 타는 불길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저 또한 곱슬머리 그의 마음에 불길을 일으켰는지 단둘이서 아주 짧은 시간에 가까워졌습니다. 불빛을 불길로 만들어 준 기름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니 아마 자기 내면에 숨겨왔던 아니마(남성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감정적인 성향, 감수성)와 아니무스(여성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향)가 구현된 모습을 서로에게서 본 듯합니다. 내면에 품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부분을 곱슬머리 그는 시원하게 표현해 주었거든요. 처음에는 자신이 만들어 낸 아니마, 아니무스에 끌렸고,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다행히 잘 맞춰 나가고 있습니다.
곱슬머리 그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있잖아요, 우리는 아직 생각할 거리가 너무나 많지만 괜찮아요. 함께할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요.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있던 제게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너.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내주어서, 나와 함께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애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