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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반 컵 16화

시절 인연 1

by anego emi

저는 여자에게 잘 반하는 편입니다. 이것은 저의 성적 취향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단지, 여성에게 발견되는 멋짐이 저에게`순간 와닿을 때 저도 모르게 마음을 줘버리는 것이죠. 그녀와 친해지고 싶고, 그녀를 알고 싶고, 그녀와 밥 한 끼 먹고 싶고, 약속 없는 금요일 밤이면, 그녀에게 술 한잔 하자고 무심하게 톡을 보낼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어지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저는 여자 선후배들과 오랜 우정을 쌓아가는 편입니다. 자주 만나지 않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불쑥 물어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인연들이지요.


제가 그녀들에게 반하는 이유는 다양한데, 뛰어난 능력은 물론이고 착한 심성, 성실함, 타인을 향한 배려, 친절함 등입니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지만 그 말이 항상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저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지인들 모임에 제가 반한 여인을 데려가면 그들은 반가워하면서도 어색해합니다, “ 어, 둘이 친한 사이였어요? 어떻게요? ” 하고 은근슬쩍 묻곤 했죠. 그들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오늘 초대한 그녀와 제가 전혀 접점이 없어 보기기 때문일 터이지요. 같은 회사라도 부서가 다양하고, 부사별로 협업할 일이 없는 경우는 얼굴을 마주 할 일이 없고, 어쩌다 스쳐 지나가도 가벼운 목례를 할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광고회사의 꽃이라고 하는 제작팀의 수장이고, 그녀는 총무팀의 맏언니였으니까요.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제 쪽입니다. 저는 그녀의 친절함과 성실함에 반했습니다. 늘 정신없이 바쁜 우리 팀의 야근비를 챙기고, 저의 해외 출장비를 말하지 않아도 먼저 챙깁니다. 그리고 제대로 찾아 쓰지 못하는 문화비를 어떻게든 쓸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주고, 수시로 잊어버리는 사원증을 군소리 없이 만들어 줍니다. 늘 미안해하는 저에게 그녀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하죠. “ 매일 힘든 일 하느라 애쓰시잖아요. 부장님 얼굴 보면 안쓰러워요” 그런 그녀에게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녀가 저에게만 특별히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깨물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 하는 자식을 챙기는 부모의 마음으로 회사의 모든 직원들에게 그렇게 합니다.


회사에서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하, 이점 또한 제가 특별히 더 반한 지점입니다.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라웠죠. 늘 누군가에는 반드시 욕을 먹으면 버티는 저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지요. 그런 그녀를 제 곁에 두고 힘들고 속상할 때마다 투정을 부리고, 저를 좀 토닥여 달라고 조르고 싶을 지경이었지요. 다행히, 그녀도 저를 무척 따르는 편이었고, 함께 야근을 하는 날이면 늦은 저녁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녀 또한 저처럼 애주가여서 술 몇 잔이면 서로의 벽은 금세 허물어지고, 제가 쏟아내는 광고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었죠. 늘 저를 자랑스러운 선배로 추켜세웠고, 생일이면 소박한 선물을 책상 위에 몰래 놓아두곤 했답니다. 저는 사내에서 친한 무리들과의 모임에 가끔 그녀를 데리고 갔지만, 입만 열면 나오는 일 이야기에 그녀는 전혀 대화에 낄 수가 없었고, 눈치 빠른 모임의 멤버들이 애써 화제를 전환해 보지만 어색함은 매한가지였죠. 그 후로, 저는 그녀와는 둘이 만나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녀가 찾아낸 새로운 맛집 혹은 시장 골목들을 누비며 먹고 마시고 수다를 떨았죠. 그 시간이 참 편안했습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가 퇴사를 하고 도쿄 유학생활을 끝내고 돌아와서 가장 먼저 연락한 것도 그녀입니다. 몇 년 만에 만난 그녀는 차장으로 승진을 했고, 커리어 우먼으로서의 노련미가 말투며 행동에서 묻어났죠. 단 변함없는 것은 그녀의 스타일이었습니다. 제조사인 계열사에서 온 그녀는 광고회사와 어울리는 스타일과는 멀었죠. 타고난 감각을 지닌 인간들로 넘처나는 광고회사에서, 그녀는 소박하고 수수한 것을 넘어 촌스러운 쪽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일을 제외한 듣기 싫은 소리는 하지 않는 저이지만, 그녀의 스타일에 관해서는 불편한 소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가끔씩 들었죠. 이렇게 착하고 성실하고 똑똑한 그녀가 좀 더 세련되고 멋진 스타일로 기죽지 않고 회사를 누비고, 저처럼 그녀에게 홀딱 반한 남자라도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 저는 종종 그녀에게 최근에 감동받은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무아지경에 빠지곤 하는데,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적당한 타이밍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지만, 별반 리엑션이 없다는 점에서 제가 전적으로 주도하는 이 대화에 관심이 없는 것이지요. 취향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그녀와 저는 서로를 아끼는 만큼 노력을 하는 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웬만해서 영화관을 가지 않는 그녀지만 제가 예매한 영화를 군말 없이 같이 본다거나, 곱창이나 닭발과 같은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저이지만 그녀가 너무 좋아하는 야식이기 군소리 없이 맛있게 먹으려 애를 쓰지요. 그렇게 서로를 맞추다 보니 별 문제가 없는 듯했는데, 늘 똑같은 대화와 메뉴에 슬슬 지겨워질 무렵, 우리는 도쿄 여행을 떠나기로 합니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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