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뛰어난 미모 덕분에 늘 인기가 많았던 언니는 대학 4학년에 불같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때 우리 집의 통금 시간은 밤 10시였는데, 언니가 매번 이 시간을 넘기는 탓에 한 밤중에 아버지의 불호령이 온 집안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언니가 멋져 보였죠.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언니는 늘 발그스레 들떠 있었고 아름다웠습니다.
그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상대 쪽 어머니가 언니를 반대하면서부터였습니다. 언니와 사랑에 빠진 상대는 부산에서 부동산으로 큰돈을 번 부잣집의 유일한 귀한 아들이었는데, 하나뿐인 며느리는 서울에 있는 명문대를 나온 여자여야 한다 고 했죠. 집안에 돈이 넘치고 아들이 키도 크고 훤칠하니 선 시장에 내놓으면 얼마든지 줄을 선다고 자신하면서 말이죠. 마음에 비수를 꽂는 모진 잔소리와 외출 금지령이라는 가혹한 물리적 구속에도, 둘의 사랑은 굳건했고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둘은 한 밤의 교통사고라는 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다시 살아나 사랑을 맹세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답니다.
넥플릭스의 인기 시리즈 ‘폭삭 속았수다’에서, 딸과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하는 상대편 아들의 엄마는 주인공, 애심에게 말합니다. “ 내 마음속에 이 큰 돌덩어리 좀 내려놓게, 이 결혼 좀 말리자고요. 제발.” 그러자 애심이 답하죠. “ 당신이 내려놓고 싶은 그 돌, 평생 당신 아들 가슴에 내려놓는 거예요 ” 그러나 그 돌은 역시 언니의 가슴에도 내려앉았습니다. 어렵게 선을 봐서 결혼을 했으나 1년을 넘기지 못했죠. 언니는 이혼 후에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러다가 작은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힘에 부쳤습니다. 그 후 학원을 정리하고 프리랜서로 피아노를 가르치며 일을 놓지 않았죠. 아빠와 제가 힘을 모아 사 준 소형차를 몰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약속을 잡고 미련할 정도로 피아노를 가르쳤답니다.
몇 년 후, 아버지가 파킨슨 병을 선고받고 점점 몸이 굳어지자, 언니는 아버지를 건강하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매일 아버지를 운동시키고 마사지를 하며 과도하게 아버지의 건강에 집착하기 시작했죠. 먹는 것부터 먹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 자는 시간까지 챙겼습니다. 서서히 엄마는 이런 언니의 집착을 힘들어했죠. 원래 두 사람의 성격은 달라도 너무 달랐고, 엄마는 언니의 상대를 향한 강한 집착이 이혼을 불러왔을 것이라며 탐탁지 않아 했죠. 언제부터인가, 언니는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아버지가 더 이상 건강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후부터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불면의 밤은 날마다 언니의 몸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새벽이 와야 한 줌 더 허약해진 그녀를 확인하고 나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니는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갔습니다. 식욕을 잃었고 억지로 무언가를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고 했죠. 언니는 가끔 저에게 전화를 걸어 말하곤 했습니다. “ 엄마보다 딱 하루만 더 살면 좋겠어. 나는 그걸 목표로 산다 ” 그러나 언니는 스스로와 한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습니다. 언니를 보내고 저는 영영 읽음으로 사라지지 못하는, 제가 언니에게 보낸 마지막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다가 꽉 찬 눈물방울을 떨구고 맙니다. 언니는 집착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고 또 받고 싶었을 뿐인데… 저는... 그걸 매정하게 떨쳐내기만 했습니다.
저는 남은 생생 내내 언니에게 해주지 못한 다정한 말들과 언니가 사고 싶어 하던 신발을 선뜩 사주지 못했던 미안함과 언니가 나에게 건 수많은 부재중 전화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겁니다. 기꺼이 이 무거운 마음들을 품고 세상을 슬퍼하고 연민할 참입니다. 이 연민으로 저의 반 컵을 다 채워도 결코 후회는 없을 만큼요. 생이 끝나는 날 저는 언니가 저를 불러주기를 소원합니다. 애교가 듬뿍 담긴 가늘고 여린 다정한 그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주면, 저는 망설임 없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언니의 손을 잡고 따라나설 겁니다. < 아네고 에미>
PS) 지금까지. '반 컵' 에세이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새해에 더욱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남은 한 해 잘 보내시고,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