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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숑숑 Oct 11. 2021

N과 쓰기

글쓰기로 이어진 실

N은 중학생이 되어 처음 사귄 친구였다. 그 애의 목소리는 깨랑 깨랑 했고, 항상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했다. 그 모습이 꼭 한 두 살 많은 언니 같았다. 그 애는 내 뒷자리에 앉았다. 이제 막 입학해 집합이니, Be동사니 뭐가 뭔지 하나도 몰라 헤매고 있는 내게 N은 나를 툭툭 치며 물었다. "내가 좀 가르쳐 줄까?" 상냥하지만 우월한 태도였다. 나는 그 애의 눈을 바라보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N은 씨익 웃더니 그날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N의 집은 일반 가정집이었으나, 그 애만큼 어떤 포스가 넘치는 집이기도 했다.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을 넋 놓고 쳐다봤다. "이거 네가 다 읽는 책이야?" 걔는 이쪽을 자랑스럽게 한번 쓱- 쳐다보더니,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빌려가도 좋다고 했다. 나는 왠지 기가 죽어 책 등을 드르륵 쓸었다. 간단한 간식을 내온 후 N은 몇 가지 문제집 리스트를 적어줬다. 이 문제집을 사 오면, 방과 후에 자기가 매일 공부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N은 내게 선생님이나 다름없었다. 수업이 시작되면 그 애는 제일 먼저 스케치북을 펼치고 그동안 내가 따라가기 힘들어했던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N의 머릿속엔 모든 개념이 알맞은 곳에 정리, 분류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비교적 쉬운 내용에선 느슨하게 쉬어갔다가, 강조를 해야 할 곳에선 숨을 빠르게 몰아 쉬며 말을 했다. 나는 그 리듬을 따라가기 위해 몸이든, 마음이든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쉬는 시간엔 N의 책을 구경했다. 왠지 읽어선 안 되는 책 같았다. 데미안, 알베르 카뮈, 헤르만 헤세 그때는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나는 책 한 권을 꺼내 휘리릭 빠르게 넘겼다. 앞머리가 펄럭일 때마다 종이 냄새가 났다. 고개를 들어 N을 바라봤다. 그 애는 나와 다르게 책을 읽고 있었다. 좌우로 움직이는 동공,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가슴, 슥슥 책 넘기는 소리.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나는 책 모서리를 만지작 거리며 숨을 멈췄다. N이 잘난 걸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집으로 가고 싶었다.


 어느 날 N은 내게 교환일기를 쓰자고 말했다. 친한 친구끼리 교환일기를 쓰는 게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먼저 일기를 쓸 사람은 N이었다. 다음날 나는 N이 무엇을 썼을지 궁금한 마음으로 일기장을 폈다. 그리고 나는 '말도 안 돼'를 외치며 공책을 덮었다. 그 애의 필력은 믿기지가 않았다. N이 표현한 하루는 진지하지만, 생동감 넘치고, 재밌었다. 나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나도 저렇게 쓰고 싶어.  어떻게 하면 N보다 나은 일기를 쓸 수 있을까 샤프를 입에 물고 두 시간 동안 텅 빈 노트만 째려봤다.  나는 열등감에 불타올랐다.


나에게 '쓰기' 증거를 모으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밤중에 아빠가 엄마를 때렸을 . 엄마가 살려달라고  이름을 부르면서 울었을 . 몸이 떨리도록 섭고, 어린 내가   있는 것이 없어 무력했을 . 나는  순간의 감정과 경험을 기록했다. 시간이 지나 엄마는 '우리가 언제 싸웠어'라고 웃으며 얘기했고, 그럼 나는 그날 밤이 사라지는 것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어 두려웠다. 그럴  일기장을 펼쳤다. 여기에 이렇게 고통이 있지. 여기에 존재 하지. 그러니까 네가 거짓말하고 있는  아니야. 그렇게나마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만큼 쓰기에 큰 애착이 있었던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었다. N이 공부를 잘 하든, 말을 잘 하든 그건 욕심나지 않지만 쓰기 만큼은 내가 그 애보다 잘하고 싶었다. 먼저 학교에서 하는 독서논술반을 등록했다. N은 그동안 각종 글쓰기 상을 휩쓸었다. 나는 점점 공부는 뒷전으로 두고 동네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비록 N이 읽던 고전은 못 읽지만, 내가 재밌으면 그만이었다. 다 읽은 책은 독후감을 썼다. 느리지만 독서이력을 차곡차곡 쌓아가기 시작했다. 독서논술반에서는 신문 사설을 읽고 비평하는 글을 썼다. 다 쓴 글은 친구들끼리 서로 바꿔가며 글을 읽었다. 이 부분은 어떻게 고쳤으면 좋겠는지 무엇이 아쉬웠는지 돌아가면서 얘기했다. 그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는데 그것이 바로 합평 시간이었다. 나는 1년 동안 글쓰기 훈련에 푹 빠져 지냈다.  


한 번은 국어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이런 말을 했다.

"숑은 달팽이 같은 사람이지.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항상 움직이는 사람."

글쓰기 숙제를 잘하고 싶어서 계속 썼다, 지웠다 반복해서 너덜너덜 해진 노트를 보고 한 말이었다. 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그걸 보고 있던 N의 기운이 이상했다. 거기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그 해에 글쓰기 대회에서는 N을 제치고 내가 상을 받았다. 나는 어디 산과 들로 소리를 지르며 내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에 쌓여 있는 독서 기록장, 독서논술반 자료, 책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가서 뽀뽀라도 해줘야지. 하지만 N은 '어떻게 쟤가?'라고 하는 듯 얼이 빠져 있었다.


나와 N의 관계는 마치  드라마 <나의 눈부신 친구>의 릴라와 레누 같았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열등감과 질투심에 죽도록 미워하기도 하는. 때로는 N의 존재가 크나큰 스트레스라 당장에라도 안 보고 살 수 있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가도, 서로에게 교환일기를 쓰는 날이면 금방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닌 척 은근히 서로의 글을 살펴보면서. 어느 날은 잘난척하고 어느 날은 깨지기도 하면서. N과 나는 '글쓰기'라는 실로 이어져 있었다. 그때는 그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글을 맨 처음 썼던 때를 떠올리면 나는 언제나 이렇게 제일 어설프게 쓰기 시작했던 중학생 때가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은 연락도 안 하고 지내는 N까지. 그때 N이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그녀의 감성이 나를  자극하고, 그녀의 잘 다듬어진 문장이 나를 자극했기에 내 10대의 열정이 좀 더 일찍 눈을 뜬 건 맞으니까. 그때만큼 글에 몰두하면서 지냈던 때가 또 없는 것 같다. 팔이 아프도록 써도 힘들지 않고, 지우개똥을 이만큼 쌓으면서 써도 지겨운지 몰랐으니까. 똑같은 문장을 단어만, 조사만 바꿔도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되고 거기에 품을 많이 들일수록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때이기도 했다. 그 시간을 통과해서 다행이다. 오랜만에 진득하게 내가 왜 쓰게 됐는지 생각해 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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