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에스파의 데뷔를 보고 블로그에 글을 하나 썼었다. SM이 6년만에 내놓은 걸그룹치고는 조금 실망스럽다는 기조의 논평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에스파를 같은 4인조로서 전례없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블랙핑크와 비교했기 때문이다. 에스파 멤버들이 못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개개인의 역량을 따지면 블랙핑크의 신인 시절에 미치지 못한다고 봤다. 개인의 능력과 스타성이 회사를 뛰어넘을 정도의 인재는 절대 뽑지 않는 SM의 고집이 또 한 번 발동됐고, 그래서 에스파는 딱 SM식 음악을 무리없이 소화할 정도로만 잘한다고 썼다. <Black Mamba>와 <Next Level>이라는 초창기 히트곡에서조차 멤버들보다 유영진의 지배력이 더 돋보였다는 사실을 주장의 근거로 써먹었다.
그러나 벌써 5년이 넘은 중견그룹이 된 지금, 그들에 대한 내 평가는 상당히 달라졌다. 그간 에스파에게 맡겨진 SM의 곡들이 무척이나 좋았을 뿐 아니라 멤버들의 수행력도 꾸준히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랙핑크 뿐 아니라 그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는 본인들만의 미학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고 결론내리게 되었다.
<Supernova>와 <Armageddon>, <Whiplash>로 대표되는 2024년의 성취는 그 정점이었다. 이 정도 수준으로 세련되고 정교하며 균형잡힌 곡을 세 개나 같은 해에 터뜨리다니, 괜히 SM이 아니었다. 컨셉과 음악, 퍼포먼스 및 비주얼 각각의 완성도가 높은 데 더해 그 모든 요소의 합일성까지 선명했고, 팬들이 돈 냄새 난다고 표현하는 비트와 사운드는 청각적 황홀감을 극대화했다.
세 곡이 대표하는 에스파의 음악은 엔시티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있는, 꽤나 이상하고 독특한 작품들이었고 이런 곡들은 퍼포머가 청자를 설득할 수 있느냐가 승패를 가르게 마련이다. 멜론 차트의 꼭대기에서 도무지 내려올 줄을 모르던 수퍼노바는 이 승부의 결과에 대한 명확한 증명이었다.
심지어 SM은 에스파와 완전히 반대되는 미학으로 그들을 능가하는 성공을 거둔 뉴진스를 이미 목격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경쟁자를 벤치마킹하기는 커녕 자기들이 제일 잘하는 것 - 극도의 정제와 인공적 개입 - 을 극한까지 밀어붙여서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이건 본인들의 음악에 자신감이 없었다면, 에스파라는 팀의 기획의도에 후회가 있었다면 나올 수 없었던 선택이다.
다년 간의 트레이닝과 실전 경험으로 다져진 멤버들의 가창 능력 역시 빛을 발했다. 나는 카리나와 지젤이 범접할 수 없는 기본기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음악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과감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들의 랩은 이 난해한 곡들이 요구하는 바를 정확히 구현해냈다. 윈터와 닝닝은 두 언니와는 반대로 SM 특유의 기본기 탄탄한 보컬 전통을 따름으로써 대중친화적 요소를 붙잡았다.
그래서, 줄줄이 써놓긴 했지만, 결국 이 시기 에스파의 음악을 들으면서 내가 내뱉는 말은 단 한 마디다.
아, 너무 좋은데?
음악 외적인 측면에서도 멤버들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지난 일 년간 카리나와 윈터를 둘러싼 잡음이 무척 많았고, 거기에 대처하는 둘의 태도를 보면서 꽤나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면 화를 내는 팬들도 있을 것을 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이 언제나 팬들 마음에 드는 방식이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감당해야 할 비난이 더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회피하기보다는 직면하는 쪽이었던 자세를 성숙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앞의 둘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더독이었던 지젤과 닝닝의 성장도 주목할 만하다. 여전히 에스파는 카리나와 윈터의 스타성이 돋보이는 팀이지만, 멤버들간의 격차가 심하다고 평할 사람은 이제는 거의 없을 것이다. 소수 인원으로 이루어진 만큼 네 명 모두의 매력이 골고루 두드러지는 것이 그룹의 존속에 중요한 과제였고, 에스파는 이 숙제를 상당히 잘 해결한 편이다.
2024년 앨범이 좋아서 이전 앨범도 돌아가서 듣느라 아직 2025년의 에스파를 듣지 못했다. 정점에 오른 그들의 음악이 어떻게 진화했을지 궁금하다. 실력적인 면에서 아이돌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데뷔한지 만으로 5년이 지난 올해 그들이 선보일 음악이 어떨지도 기다려진다. 20대 중후반으로 인생에 있어서도 절정을 보내고 있는 네 아가씨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