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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an 16. 2018

그 사람의 위로법

가볍게, 맥주 한 잔 




언제부턴가 중요한 일을 끝내고 나면 맥주부터 찾는 버릇이 생겼다. 바삭한 튀김에 톡 쏘는 맥주 한잔이면 이제 정말 끝났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속이 후련해진다. 특히 하루의 끝에 마시는 맥주는 나에게 주는 보상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20대의 절반 이상을 소주파로 살았던 내가 어쩌다 맥주로 갈아타게 된 걸까. 아마도 한 선배가 무심히 맥주를 건네던 그날부터가 아닐까 싶다. 



그날, 늦은 퇴근길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 동네까지 오게 된 건, 사실 아주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동아리에서 처음 알게 된 우린 그 시기에 일어난 몇 가지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돌아보면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그 시절의 나는 꽤나 예민했었고,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을 만큼 별 거 아닌 일에도 몇 시간씩 고민에 빠지곤 했다. 오죽하면 걱정인형이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 내가 취준생이라는 악조건에 처해 있었던 것도 분명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땐 모든 일에 무던한 성격이 세상 가장 부러웠는데, 그런 사람이 바로 선배였다. 작은 일에도 금세 심각해지는 나를 보며 '넌 고민 때문에 고민이겠다'며 농담을 던지곤 했다.



이런 극과 극의 성격 때문이었을까. 우리 사이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었다. 어떤 날은 툭 내뱉은 말의 의중을 파악하려 여러 번 곱씹기도 했고, 그의 무던함이 지나치다 느껴져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내겐 유독 어렵게 느껴지는 선배였기에 얼굴 볼 일이 많은 환경이었음에도 쉽게 가까워지지 못했다. 줄곧 나와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라 여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그런 무뚝뚝한 선배가 내 심각한 목소리에 집 앞까지 찾아와 주다니. 내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심각해. 편의점 어딨어?"



내가 건너편을 가리키자 성큼성큼 그곳으로 들어가 맥주와 과자 몇 봉지를 샀다. 편안한 옷차림의 사람들은 편의점 안에 차려진 자그마한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도 그들 틈에 섞여 앉았다. 선배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내게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을 했다. 걱정하기 위해 사는 것 같다는 둥, 이런 말 해줘도 어차피 넌 몇 년 뒤에도 똑같을 거라는 둥, 미리 고민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둥, 여느 때와 같이 내가 바라는 말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날은 이상했다. 그 말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들렸다. 이 사람이 건네는 위로의 방식은 다정한 말 대신 그냥 무심히 맥주를 건네는 것, 그리고 고민의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자 그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무뚝뚝한 그의 말에 매번 입을 삐쭉이던 나는, 내 세상에서 쓰는 위로의 말만 기대했었다는 것을.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으면 내 속도 몰라주는 냉혹한 사람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간다. 쓸 데 없는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자. 어차피 오늘 생각한 건 아무 도움도 안 될 거야."



맥주 두 캔을 깨끗이 비운 그는 쏟아지는 졸음을 억누르며 다시 택시에 올랐다. 별다른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줄줄이 이어지던 내 걱정거리들이 뚝, 하고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뭘 고민했는지도 잊은 채 포옥 잠이 들었다. 



나는 어느덧 그때의 선배와 같은 나이가 되었다.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이면 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 앞까지 찾아와 준 그에게 더 큰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따금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운 날엔 그에게 문자를 보낸다. 이전보다 훨씬 편하게 그리고 부담 없이 '한잔 하시죠'라고. 아마 요즘은 또 무슨 쓸 데 없는 고민을 하냐며 퉁명스럽게 대답할 게 분명하지만, 더 이상 그 말이 날카롭게 들리지 않는다. 내겐 무심하다 느껴질 만큼 무뚝뚝한 말일지라도 그에게는 꽤나 살가운 표현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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