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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r 13. 2018

부담의 무게

우리에게 가장 냉정한 건, 우리 자신인지도.




유난히 반짝이는 눈, 단정한 머리, 말투마저 똑 부러지는 그녀가 발표를 마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칭찬을 쏟아냈다. 대학을 졸업하려면 일 년도 더 남았지만, 현업에 바로 투입해도 되겠다는 말이 뒤풀이 자리까지 이어졌다. 발표 시간 내내 오른손에 쥐어진 큐시트를 단 한 번도 보지 않는 모습에서 지난 노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와 꼭 붙어 지낸 일 년. 일적인 부분은 물론, 인간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그랬다. 뭐든 열심히인 친구였다.



대학 졸업을 3개월 앞두었던 그때. 대외활동에서 만난 그녀와는 첫 프로젝트부터 한 팀이 되었고, 배정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혼자 산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는지 양손 가득 장을 봐가지고는 직접 볶음밥을 만들어주겠다며 두 팔을 걷어붙였다. 



"그냥 대충대충 잘라. 입에 넣을 수 있는 크기면 되지."

"안돼요, 언니. 이렇게 잘게 잘라야 먹기 편하죠.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언니는 저기 가서 TV 보고 계세요."



일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밥까지 뚝딱 만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못하는 게 없구나란 생각을 했다. 우리는 커다란 프라이팬에 담긴 볶음밥을 나눠 먹으며 처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보다 2살이 어리다는 것과 나와 비슷한 꿈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동생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속 깊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 한 번의 만남은 우리를 가까운 사이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녀의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 덕에 나의 일 년도 무탈히 흘러갔다. 어디서도 얻기 힘든 귀한 인연이었다.



대외활동이 끝나고도 우리는 주기적으로 밥을 먹었다. 내가 먼저 취업을 한 후로는 그 시간이 턱 없이 줄어들었지만, 짧게라도 만나 근황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은 종로의 한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기에 퇴근길에 잠시 들르겠다고 했다. 그녀는 소음이 적은 안쪽 자리에 앉아 묵직한 수험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테이블로 다가갔다. 반대편에 놓여 있던 백팩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찰나 그 무게가 꽤 무거워 깜짝 놀랐다.



"너 뭘 들고 다니길래 무게가 이래. 완전 돌덩이네."



그제야 나를 발견한 그녀는 서둘러 백팩을 다른 자리로 옮겼다. 가방 안엔 온갖 종류의 책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나는 종일 카페에 있을 생각으로 모두 챙겨 왔냐 물었고, 그녀는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생각지 못한 대답을 했다.



"필요한 건 몇 권 안되는데, 다 갖고 다녀야 마음이 놓여요. 스스로에게 주는 짐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요. 항상 부담을 가지라는 의미로. 편하게 있으면 안 될 것 같거든요. 해이해지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금 눈 앞에 앉아있는 그녀처럼, 
때때로 우린 우리 자신에게 너무도 가혹한 것 같아서였다. 묵묵히 해내고 있음에도 괜한 의심을 하고, 잘한 것보다 못한 것을 들춰내 꾸짖기 바빴다. 전적으로 내 편이 되어줘야 할 사람은 자신임에도- 나도, 그녀도 스스로를 들들 볶지 못해 안달인 날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순간의 대부분은 우리가 궁지에 몰렸을 때였다. 그때마저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그 마음을 다독여줄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를 매섭게 몰아붙였던 어느 때를 떠올렸다. 그때 내가 나를 조금 더 믿어주었다면, 그날들이 조금은 덜 힘겨웠을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누군가는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널 믿지 못하는 사람이 너인 건 아니냐고.



"이제 가방 무게부터 확인할 거야. 종일 열심히 공부한 너한테 너무하잖아. 그러지 마. 안 그래도 돼."



나는 그녀가 매일 짊어질 무게가 걱정스러웠다. 이 무게를 모두 감당하지 않더라도 뭐든 충분히 잘 해낼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언제쯤 깨닫게 될까. 지하철역까지 함께 걷는 동안, 나는 백팩의 한쪽 끈을 꼭 쥐고 있었다. 누구도 예뻐하지 않을 수 없는 그녀가 부담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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