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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지오: 조용하고 느리게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Feb 13. 2018

동의하지 않아요

내 마음에 귀 기울이는 시간




"여긴 자몽에이드가 맛있어요."



비교적 여유로웠던 평일 오후. 처음 인사를 나눈 분들과 식사를 하고, 근처에 있는 카페에 도착했다. 그때 한 직원이 평소에 자주 오는 곳이라며 선뜻 메뉴를 추천해주었다. 메뉴판을 골똘히 보고 있던 모두는 일제히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럼 전 자몽에이드."

"저도!"

"저도요."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따랐지만, 자몽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잠시 망설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했다.



"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부탁드려요."



누군가는 참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이지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대방이 건넨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 혹은 거절 의사를 표하는 것이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음료 한 잔을 고르는 아주 사소한 결정도 예전의 나였다면 그녀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친절하게 메뉴를 추천해준 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선택을 하는 분위기에서 선뜻 내 의견을 말하기란 어려웠을 테니까. 그런 이유로 하루에도 여러 번, 나의 의견을 굽히는 일이 많았다. 어찌 보면 그게 더 익숙한 일이었다.



"다 맞추려고 하니까 힘들지. 그럴 필요 없는데. 상대방은 네가 이렇게까지 맞추고 있는지도 모를 걸."



누군가의 결정을 따랐지만 그게 내내 마음에 걸리는 날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친구로부터 미련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맞출 필요 뭐 있느냐고. 어차피 그 순간이 지나면 아무도 기억 못 할 거라고. 그땐 그게 수월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른 의견을 얘기할수록 상황은 복잡해지고 피곤해질 테니까. 딱히 싫은 게 아니라면 그대로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을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친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습관이라고 믿었던 그 일들 속에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그때그때의 결정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제대로 된 표현을 하지 못한 게 아닐까, 하고.



"어떨 땐 이런 내가 잘 이해가 안 돼.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조차 내 의견을 잘 내놓지 못할 때도 있거든. 그냥, 까다롭거나 나쁜 사람 되기 싫은 건지도 몰라. 늘 둥글둥글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막상 겪어보니까 이게 좋은 것만은 아닌 거 같아."



그때, 내 하소연을 듣고 있던 친구는 담담하면서도 확고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 의견을 똑 부러지게 말했다고 해서 널 미워할 사람이라면, 차라리 옆에 없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왜 그렇게 후련했을까. 아직까지도 그 순간에 친구가 해준 말이 나의 생을 참 많이 바꿔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누군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저만치 미뤄두었던 내 마음들. 점심 메뉴를 고르는 아주 사소한 결정부터 내 미래를 전부 바꿔놓을 수도 있을 중대한 결정까지 내 마음에 먼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대상이 내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속에도 있다는 걸, 꽤 오랫동안 모르고 살았던 것 같았다. 



주문한 음료를 받아 든 우리는 근처를 조금 걷기로 했다. 주말 사이 날씨가 조금 풀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쌀쌀하게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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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에세이 『누구에게나 그런 날』(2016).
suri198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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