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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Dec 17. 2018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THE BIG ISSUE KOREA 192



1998년, 그때 그 광고를 기억하시나요? 온 에어 된 지 벌써 20년이나 흘렀네요. 당대 최고 배우 한석규 씨와 속세를 떠난 듯 보이는 스님이 나란히 담양 숲을 걷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광고 중반부까지 푸른 대나무 풍경과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 만이 흘러나오죠. 한동안 잔잔하게 흘러가던 광고는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자 잠시 긴장감을 갖습니다. 이때, 아무런 동요 없이 걷는 스님의 모습이 클로즈업되며, 한 번쯤 들어봤을 익숙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옵니다.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당시엔 통신사 광고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의아했습니다. 경쟁사가 앞다투어 자사의 제품력을 어필하기 바쁜 시기에 이 광고는 전혀 다른 화법을 택한 것 같았거든요. 한편으론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담양의 깊은 숲 속을 배경으로 한 것 자체가 끊기지 않는 통화 품질을 전달하기에 충분했으니까요. 지금 봐도 과감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휴대폰이 대중화하기 시작한 때, 보는 이들로 하여금 '진짜 휴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었죠.


돌이켜보면, 최근 한 달은 특히 휴대폰에 매여 산 날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만 살펴보더라도 광고주, 기획팀, 협력 업체 등 수십 통이 넘는 문자와 전화를 주고받았죠. 배터리가 20%만 남아도 전전긍긍했습니다. 잠시 다른 일을 하다 보면 몇 백 개 넘는 메시지가 쌓여 있기 일쑤고, 휴대폰 없이는 업무를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일과 휴식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직종일수록 더 그렇겠지요. 보조 배터리까지 챙겨 다니는 지인들을 보면, 20년 전 스피드 011의 메시지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만 해도 그렇거든요. 커피를 마시는 동안만이라도 모른 척 꺼두고 싶어져요.


그래서 손에서 내려놓는 게 어색해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턴가 회사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는 순간에도 휴대폰을 모른 척하기 힘들어진 것 같아요. 새로운 메시지가 왔을까 봐, 재미있는 사진이 올라왔을까 봐, 깜짝 놀랄 만한 뉴스가 업데이트됐을까 봐, 혹시나 시시각각 변하는 휴대폰 속 세상을 나만 놓쳐버릴까 봐 불안했어요. 아침에는 실시간 뉴스들을 훑어보고, 저녁에는 갓 올라온 영상들을 틀어보고, 그러다 보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과의 시간도 지금뿐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정작 휴대폰만 붙잡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저 역시 그런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Telefónica 'Switch off Campaign' (출처: www.welovead.com)



"CONNECT WITH YOUR LIFE"


물론, 휴대폰의 역할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제주도에 있는 제 조카만 떠올려봐도 그래요. 휴대폰이 없었다면, 직접 찾아가지 않고서는 보기 어려웠겠죠. 매일 아침, 언니가 보내주는 사진과 영상도 모두 불가능했을 거예요. 세상에 휴대폰만큼 생생한 사진첩은 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가끔 그럴 때가 있거든요. 휴대폰 속에 이 순간을 고스란히 담으려다 보면, 제 두 눈에 담아두는 걸 깜빡하고 맙니다. 서로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짓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들을 갉아먹는 거죠. 저 광고 속 이미지처럼 그때의 느낌이나 감정은 쉽게 떠올릴 수 있지만, 상대방의 얼굴과 풍경은 흐릿하게 떠오르더군요.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의식적으로라도 휴대폰을 넣어두게 되었습니다. 기록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는 하나뿐인 조카에게 최신 휴대폰보다 화단에 핀 꽃과 그 꽃을 닮은 색연필을 쥐어주는 이모가 되고 싶어요. 재미있는 동영상 대신 진짜 살아 숨 쉬는 것들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나 기술은 몰라도 좋지만, 매일 우리 곁에 머무는 예쁜 것들은 모두 누리며 살길 바라니까요.


문득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에게도, 이 글을 읽게 될 당신에게도 말해주고 싶네요. 놓치고 싶지 않은 세상과 마주할 땐, 휴대폰을 잠시 꺼둬도 괜찮다고요. 그런 사소한 시간들이 때론 휴대폰에 담지 못할 만큼 귀한 추억을 심어줄 수 있다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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