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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y 04. 2019

걱정병 환자와 산다는 것

어쩌다 보니 사중인격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병이라고 칭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걱정거리를 안고 산다. 걱정거리가 없을 때는 스스로 찾아 나서는 수준이다. 대부분 매우 쓸데없는 경우가 많은데 가령 이런 것이다. 행여나 불이 날까 봐 꼭 전기 코드 뽑고 외출하기, 고양이가 창문 밖으로 나갈까 봐 고리까지 걸어 잠그기, 현관문이 제대로 안 닫혔을까 봐 1층까지 내려갔는데도 다시 되돌아가기. 아침마다 불안함과 씨름하다가 집으로 되돌아가는 일도 부지기수다. 지각을 피할 수 없더라도 발걸음을 멈추지 못한다.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나를 내가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한다니. 이런 사실조차 걱정스러웠다.



혼자서는 어쩌지 못한 ‘걱정병’이 조금씩 호전된 건 남편을 만나고부터였다. 연애 초반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철저히 숨겼다. 걱정 많은 사람이란 걸 들키지 않으려 끝까지 노력했지만 어느 날 비집고 나온 나의 말도 안 되는 걱정거리를 듣고 남편은 기겁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는 남자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여자를 만나게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때부터 남편의 극약처방이 내려졌다. 걱정이 슬금슬금 피어오를 때면 매번 단호하게 말했다.



“응, 아니야. 그렇게 쉽게 전기 코드에 불이 붙지 않아.”

“응, 아니야. 문 잘 잠긴 거 내가 다 봤어.”

“응, 아니야. 고양이도 생각이 있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그러지 않아.”
 
 

나에 대해 세세히 알게 된 그는 내 표정만 봐도 걱정이 시작되려는 걸 직감했고, 그때마다 앵무새처럼 말했다. 지금 걱정하는 것들 딱 끊어내라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평생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 말로 인해 근심뿐이었던 내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확인하려는 마음을 한두 번 참았더니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열 번 걱정해도 스무 번 걱정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상상했던 일은 그저 상상 속에만 남았다. 이 별거 아닌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쯤에서 한 가지 더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은 게 있다. 걱정 없는 게 걱정인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라고 말하던 남편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대만으로 떠나던 날, 우리 고양이 잘 있는지 확인했냐고 여러 번 묻던 사람이, 버스를 타기 직전 기어코 두 눈으로 봐야겠다고 말한 사람이 내가 아닌 남편이었다는 걸. 스스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6년째 글로 먹고사는 카피라이터.

3번째 결혼기념일을 앞둔 아내.

3남매 중 둘째 딸.

7년째 고양이를 모시고 있는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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