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사중인격
재작년 겨울. 병원비 명세서를 확인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1년 동안 진료받은 내용을 보니 내 월급의 한 달치는 고스란히 약을 사는 데 썼다. 병명은 또 얼마나 다양한지 두통, 복통, 치통까지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을 정도였다. 사계절을 함께 보낸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나만큼 다양하게 병원을 찾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신경치료를 끝낸 이가 다시 아파졌다. 치료를 받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악몽을 꿨다. 내가 가장 질색하는 치과 기계 소리와 마스크를 쓴 누군가에게 시달리는 꿈이었다. 왜 치아는 하나하나 나뉘어 있는 건지, 그냥 통으로 이어져 있다면 음식물이 끼거나 썩는 일은 없을 텐데. 아니, 애초에 이런 연약한 재료로 세상의 맛있는 음식들을 먹게 하는 건 부조리한 일이다. TV에서 지겹도록 나오는 333 칫솔질도 매일, 남들은 귀찮아서 건너뛰는 치실도 매일 착실하게 쓰는데 왜 나만 이렇게 치통에 시달려야 하나 억울했다.
아픈 이가 잠잠해지자 어지럼증이 왔다. 앉았다 일어나면 주변이 전부 쏟아질 듯이 뱅글뱅글 돌았다. 병들끼리 릴레이라도 하는 건가? 실비 보험에 가입할 때 만난 플래너에게서 전화가 왔다. 따뜻한 차 한잔하시라며 커피 전문점의 기프트콘도 보냈다. 친절한 말투 뒤에 왠지 '그만 좀 아파줘'라는 말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진단서를 본 남편은 한숨을 푹 쉬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연애할 때는 밤새 과제하고 술 먹어도 팔팔했던 여자친구가 결혼하니 매일 빌빌거리기만 했다. 나는 이제 돌봐줄 사람이 생겨서 그런가 보다고, 혼자 살 때는 함부로 아프지도 못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남편도 혼자 살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일 년에 감기 한 번 잘 걸리지 않는 그를 보면 나는 내심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각자가 건강을 챙기는 것은 곧 서로를 위한 일이기도 한데, 내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자꾸만 걱정을 끼치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안심이 되는 건, 골골대는 쪽이 남편이 아닌 나라는 사실이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이 사람이 나보다 건강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인다. 3년 차 새댁이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나는 남편 없이 혼자 살게 되는 것에 필요 이상의 두려움을 느낀다. 걱정거리는 꼭 남편에게 털어놔야 해결되는 내가, 남편 없이는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내가 세상에 혼자 남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한 비극은 없는 것 같아서다. 그래서 이기적인 마누라는 오늘도 남편을 붙들고 말한다.
님아, 부디 나보다 먼저 가지 마오.
6년째 글로 먹고사는 카피라이터.
3번째 결혼기념일을 앞둔 아내.
3남매 중 둘째 딸.
7년째 고양이를 모시고 있는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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