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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Aug 07. 2019

12년 동거가 남기고 간 온기

THE BIG ISSUE KOREA 206



예고에 없던 비가 매섭게 퍼붓는 날이었습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 날아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런 날씨였죠. 그 순간이 지나고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닥치기 전,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작은 신호를 보낸다는 것을요. 순식간에 어두컴컴해진 하늘과 빠르게 굵어지는 빗방울. 한동안 우리 가족의 마음은 그날의 날씨처럼 흐리기만 했습니다.


12년간 우리 곁을 지켜온 반려견이 세상을 떠나고 언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과잼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사과를 깨끗이 씻어 껍질을 까고 씨를 분리한 뒤, 도마 위에서 잘게 자르기를 여러 번, 또 설탕과 함께 졸이기를 수십 번. 언니는 쉴 새 없이 사과잼을 만들었습니다. 부엌 한쪽에 나란히 있던 빈 병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채워졌지요. 매콤한 재료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만드는 내내 언니는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저 눈물이 평생 멈추지 않으면 어쩌나, 저 역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바라보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야 깨달았어요. 언니가 왜 안 하던 행동만 골라했는지. 사과잼이든 딸기잼이든 언니에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낯선 일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정면으로 맞닥뜨리기엔 소중한 존재의 부재는 너무도 힘겨운 일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언니는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는 낯선 일들에만 매달렸어요. 꽤 오랫동안 우리 가족 모두가 그랬지요.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가 주기만을 바랐습니다.


가끔씩 산책 중인 반려견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12년 전, 언니가 그 동물병원을 지나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래서 우리 가족이 '베리'라는 존재를 아예 모르고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듭니다. 학업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던 언니가 베리와 만난 덕분에 평생 모르고 살던 행복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새카만 털에 새파란 눈을 가진 베리에게 언니는 첫눈에 반해버렸고, 며칠 동안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에겐 사랑스러운 막둥이가 생겼지요. 이루 말할 것 없이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Petz Campaign' <출처: www.adsoftheworld.com>



“They'll listen."


부재의 아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겪어봤으면서도 저는 여전히 반려동물이 주는 행복에 대해 열렬히 주장하곤 합니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다며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죠. 그러다 보면 매 순간 오랜만에 만난 듯 반겨주던 행동과 매 순간 오래도록 바라봐주던 눈빛이 떠오릅니다. 12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요. 그 어떤 대상보다 내게 집중해주던 존재의 모습을 가만히 되새기다 보면, 어느 순간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 차 버립니다. 한 시간이라도 더 달려주지 못해서, 한 번이라도 더 좋은 곳에 데리고 가지 못해서. 행여나 놓쳐버릴까 풀어주지 못한 목줄마저 미안한 일이 되고 말지요. 그 고통이 너무 컸던 탓일까요. 그럴 때마다 남몰래 다짐한 게 있습니다. 다시는 그 어떤 생명과도 가까이 지내지 않겠노라고. 훗날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나의 일상에 완전히 스며드는 그들이 저는 조금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지금 반려묘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네가 아니면 정말 갈 곳이 없어"라는 말에 덜컥 집으로 데리고 온 날, 이 작은 생명과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봤어요. 그 아픔을 감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겨우 30분밖에 함께하지 않았는데도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겪어보고 싶었어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 따뜻한 동거를. 세상엔 힘겨운 순간을 마주해야 한다 하더라도 계속해나가고 싶은 일들이 있으니까요.


이제 우리 가족은 베리에 대한 이야기를 웃으며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비슷한 생김새의 강아지를 보더라도 더 이상 울먹이거나 심장이 쿵 내려앉지 않아요. 함께했던 추억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날도 많습니다. 곁에 머문 시간은 12년이었지만, 남기고 간 기억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마음속에 자리하겠지요. 그 온기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습니다.




*이 글은 더 빅이슈 코리아 206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더 빅이슈 코리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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