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나는 딱히 잘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기도 애매했고,
어느 자리에서든 이야기는 곧잘 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모임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그저 스쳐 지나가고 흐릿해지는 그런 존재였다.
그 상태가 불편했던 것도, 크게 아쉬웠던 것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보드게임을 접하게 되면서 보드게임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매번 누구와 어떤 게임을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경험을 안겨준다는 점이
나에게는 꽤 놀랍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같은 규칙, 같은 테이블 위에서도
사람이 바뀌면 분위기와 감정, 기억까지 달라진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보드게임이라는 존재 자체에 감탄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보드게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며 단순한 즐길 거리를 넘어서 나의 진정한 취미로서 보드게임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 후로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이 나를 설명할 때 보드게임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함께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보드게임 좋아하는 사람”,
“보드게임 하면 떠오르는 사람”.
나는 여전히 나였는데,
그 앞에 하나의 색이 덧입혀진 느낌이었다.
다만 그 색이 나를 한정짓는 수식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드게임이라는 말이 나를 하나의 틀 안에 가두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색채가 생겼다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신기했던 건, 내가 의도적으로 나를 드러내려 하거나 각인시키려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했을 뿐인데,
그 꾸준함이 나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모임이 끝난 뒤 기억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워졌을 나라는 사람이,
이제는 “보드게임”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남아 있었다.
잊히지 않기 위해 애쓴 것도 아니고,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이 앞섰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이 보드게임이라는 본질을 떠올릴 때면
자연스럽게 함께 생각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변화는 ‘취미를 가졌다’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보드게임은 어느새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었고,
동시에 나를 표현하는 하나의 색채가 되었다.
색이라는 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다.
보드게임이라는 색은 나에게 그렇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색은, 어쩌면 하나의 무기일지도 모른다.
날카롭거나 공격적인 무기가 아닌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무기.
사람들 앞에서 나를 소개해야 할 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애써 말하지 않아도
이미 어느 정도 전달되어 있는 무언가.
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내 존재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 든다.
돌이켜보면 나는 여전히 크게 달라진 사람은 아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했을 뿐이다.
그 결과로 나에게 하나의 색이 생겼고,
그 색이 나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었다.
보드게임이라는 색채는
나를 더 특별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더 솔직하게 만든 것 같다.
이제 나는 그저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존재라기보다는,
어딘가에 조용히 남는 색 하나쯤은 가진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