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싸며, 구조를 챙기며

에필로그|사이공, 하이엔드를 해석하는 도시

by 이서하


마지막 맥주, 그리고 빈 방


호치민을 떠나는 날 전야. 나는 리비에라 포인트 13층 홈바에 마지막으로 앉았다.


냉장고를 비우기 위해 남겨둔 마지막 맥주 한 캔을 땄다. '치익-' 하는 소리가 텅 빈 거실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창밖을 바라봤다. 저녁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7군의 빌딩들이 마지막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도시는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 하나쯤 떠난다고 해서 달라질 리듬이 아니었다.


짐은 이미 다 쌌다. 캐리어 몇 개. 4년의 생활치고는 단출했다.


내일 아침이면 세도나를 타고 공항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이 13층의 풍경은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보통 이럴 땐 아쉬움이 남아야 했다. "더 가볼걸", "더 먹어볼걸".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웠다. 아쉬움보다는 포만감에 가까웠다.


나는 빈 캐리어를 보며 중얼거렸다.


"난 이미 충분히 채웠으니까."



가져가는 것들


내가 가져가는 것은 기념품이나 사진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의 나는 가격표를 먼저 보는 사람이었다. 비싼 것은 좋은 것, 싼 것은 나쁜 것.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사이공은 그 경계를 무너뜨렸다.


1만 원짜리 3코스 런치에서 나는 맛이 아니라 도시의 운영 효율을 봤다.

월 100만 원의 아파트에서 나는 평수가 아니라 삶을 지원하는 구조를 경험했다.

퇴근길의 스파에서 나는 사치가 아니라 회복의 시스템을 배웠다.

그리고 호텔에서, 나는 공간 대여가 아닌 시간의 설계를 목격했다.


이 네 가지 경험은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였지만,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합리적 하이엔드'는 돈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의 문제이자, 구조를 보는 능력의 문제다.


나는 이제 안다. 좋은 삶은 비싼 물건을 사는 삶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시간을, 그리고 감각을 나에게 유리한 구조로 배치하는 삶이다.



어디서든 작동할 원칙


홈바에서 마지막 모금을 마셨다.


창밖으로 7군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이미 이 도시에서 배운 '구조의 감각'을 가지고 돌아간다.


이것은 호치민에서만 통하는 마법이 아니다. 서울의 좁은 오피스텔에서도, 도쿄의 비즈니스 호텔에서도, 혹은 그 어떤 낯선 도시에서도 이 원칙은 작동할 것이다.


가격보다 가치를, 소비보다 설계를, 한 번의 이벤트보다 지속 가능한 일상을 선택하는 태도. 중요한 건 내가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사는가다.


"고마웠어, 사이공."


나는 빈 캔을 내려놓았다. 도시가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이제 가서, 네 삶을 설계해."
모든 것이 빠져나간 텅 빈 공간. 아쉬움보다 포만감이 차오르는 것은, 이 도시에서 배운 삶의 원칙들이 이미 내 안에 가득 채워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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