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는 왜 무역을 넘어 외교가 되었는가

외교는 외교관만 하는 것이 아니다.

by 이형주 David Lee

"솔직히 요즘은 전시회에서 계약 많이 안 나와요. 온라인으로 다 하니까. 그런데 저는 계속 갑니다. 왜냐면 거기 가면 15년 동안 쌓인 관계들이 있거든요. 그 사람들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우리 회사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아요. 그게 어떤 마케팅보다 강력합니다."

올해 초 만난 한 중견기업 대표의 말이다. 그는 15년째 같은 전시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나는 이 한 문장에서 전시가 왜 무역을 넘어 외교가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


계약은 온라인으로도 되는데


그의 말이 맞다. 요즘 계약은 굳이 전시장에 가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줌 미팅 몇 번이면 가격 협상이 끝나고, 이메일 몇 통이면 조건이 정리되고, 전자서명 한 번이면 계약이 완료된다.

실제로 팬데믹 3년 동안 우리는 전시장 없이도 무역이 굴러간다는 걸 확인했다. 화상 상담, 온라인 쇼룸, 가상 전시관. 기술적으로는 다 가능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2022년 오프라인 전시가 재개되자 사람들은 다시 전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호텔비를 지불하고, 며칠씩 자리를 비우면서까지.

왜? 계약은 온라인으로 되는데 뭐가 부족했던 걸까?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


그 대표의 말에 답이 있다. "그 사람들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전시장에서 15년을 만나면 단순히 얼굴을 아는 수준이 아니다. 저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지,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 어려울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알게 된다.

작년 두바이 GITEX에서 목격한 장면이 떠오른다. 한 사우디 바이어가 한국 부스 앞에서 30분 넘게 서 있었다. 제품 설명을 듣는 게 아니었다. 그냥 한국 기업들이 어떻게 부스를 운영하는지, 직원들이 다른 바이어들과 어떻게 대화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품 스펙은 이미 웹사이트에서 다 봤어요. 저는 지금 이 회사가 정말 우리 시장을 이해하고 있는지 보고 있는 겁니다."

온라인으로는 절대 전달되지 않는 게 있다. 부스를 걸어 들어가는 순간의 분위기, 직원들의 눈빛, 설명하는 태도, 예상치 못한 질문에 대응하는 방식. 이런 것들이 모여서 신뢰를 만든다.


15년이 만드는 것


"15년 동안 쌓인 관계"라는 말의 무게를 생각해 본다.

15년이면 그동안 시장이 몇 번 바뀌고, 트렌드가 몇 번 바뀌었을까. 어떤 제품은 사라지고, 어떤 기술은 낡았을 것이다. 계약 조건도 수없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관계는 남는다. 매년 그 자리에 나타나는 것. 꾸준히, 일관되게. 그게 신뢰를 쌓는다. 이건 무역의 논리가 아니다. 외교의 논리다.

국가 간 관계도 마찬가지 아닌가.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모든 게 결정되지 않는다. 수십 년간 쌓인 신뢰, 일관된 태도, 위기 때의 대응. 이런 것들이 모여서 외교 관계를 만든다.

전시도 똑같다. 한 번의 참가로 끝나지 않는다. 매년 그 자리에 서는 것 자체가 메시지가 된다.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계속 있을 겁니다. 믿어도 됩니다."


"어떻게 일하는지" 보여주는 장


"우리 회사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아요."

이 말이 핵심이다. 전시장은 회사가 어떻게 일하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카탈로그에는 완벽한 제품만 나온다. 웹사이트에는 성공 사례만 올라간다. 온라인 미팅에서는 준비된 답변만 나온다.

그런데 전시장은 다르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 들어온다. 경쟁사 제품과 바로 비교당한다. 3일 내내 부스를 지켜야 하니 피로가 쌓이고, 그때 진짜 태도가 드러난다.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어느 북유럽 국가의 한 업체가 계약 직전까지 갔던 딜이 무산됐다. 같은 국가관 내 다른 업체가 약속한 납기를 3개월이나 어긴 게 이유였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회사였는데도, 그 나라 업체 전체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는 거였다.

전시장에서는 한 기업의 태도가 곧 국가의 이미지가 된다. 그래서 전시는 무역을 넘어 외교가 된다.

"그게 어떤 마케팅보다 강력합니다"

광고는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SNS는 좋은 면만 보여줄 수 있다. 보도자료는 성과만 강조할 수 있다.

그런데 15년 동안 매년 같은 자리에 서는 건 가짜가 불가능하다. 꾸준함은 연출할 수 없다. 일관성은 위장할 수 없다.

CES에서 한국관과 중국관, 독일관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각 나라가 어떤 메시지를 세계에 던지고 싶은지가 부스 하나에 다 담긴다. 한국은 기술력을, 중국은 규모를, 독일은 신뢰를 보여준다. 이게 전부 의도된 외교 전략이다. 부스에서 만난 독일 정부 관계자가 한 말이 기억난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독일 제조업의 미래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건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독일이라는 브랜드를 세계에 재정의하는 과정이에요."

맞다. 전시는 이제 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곳이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어떤 미래를 그리는지를.


숫자로 측정할 수 없는 것


"요즘은 전시회에서 계약 많이 안 나와요."

그 대표의 이 말을 듣고 나는 물었다. "그럼 전시 성과를 어떻게 측정하세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글쎄요. 숫자로는 안 나오죠. 그런데 전시 다녀오면 알아요. 올해는 분위기가 좋았다, 나빴다. 사람들 반응이 달라졌다. 우리한테 관심이 늘었다. 이런 걸요."

외교 성과도 마찬가지 아닌가. 정상회담 한 번으로 당장 무역수지가 개선되지 않는다. 하지만 관계는 달라진다. 신뢰가 쌓인다. 3년 후, 5년 후 그게 결과로 나온다.

전시도 그렇다. 올해 계약 건수보다 중요한 건, 5년 후에도 그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하고, 믿고, 다시 찾아올 것인가다.


결국 남는 건 관계다


온라인으로는 거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관계는 만들 수 없다.

전시장에서 악수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고, 커피를 마시고, 함께 웃는 순간들. 그게 쌓여서 15년이 된다. 그리고 그 15년이 "어떤 마케팅보다 강력한" 무언가를 만든다.

그 대표는 계속 전시회에 갈 것이다. 계약이 많이 안 나와도. 온라인으로 다 되는 시대에도. 왜냐하면 그는 알기 때문이다.

진짜 거래는 계약서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신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신뢰는 클릭 한 번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매년 그 자리에 서는 것으로 쌓인다는 것을.

그래서 전시는 무역을 넘어 외교가 되었다. 제품을 파는 장이 아니라, 관계를 쌓는 장으로. 거래를 성사시키는 곳이 아니라, 신뢰를 증명하는 곳으로.

우리는 지금 그런 전시의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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