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극도로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에 빠져드는 것일까요. 최근 영국에서 발생한 극우 집회는 단순히 일부 과격 세력이 일으킨 소란으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영국 사회가 가진 불안과 갈등이 한꺼번에 드러난 장면이자,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는 극단주의 현상의 한 단면입니다. 결국 이런 사건은 인간이 불안과 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사회가 그 불안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다시금 성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불확실성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경제적 불안, 사회적 변화, 낯선 타인과의 만남은 불안을 더욱 키웁니다. 이럴 때 복잡한 현실을 단순히 ‘적과 우리’로 구분하는 것은 심리적 안정을 주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됩니다. 극단적 사고가 매력을 발휘하는 것도 바로 이런 단순화의 효과 속에서입니다.
또한 인간은 정체성을 확인할 때 타인을 배제하는 방식을 자주 씁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보다 “나는 누구와 다르지 않은가”라는 물음에 더 쉽게 답하는 것입니다. 극우적 사고는 이 배제의 논리를 극단까지 몰고 가, ‘우리는 순수하고 그들은 위협’이라는 서사를 강화합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개인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도 ‘역사의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사회적 조건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불평등과 지역 격차가 누적되고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불만은 제도권 밖에서 새로운 표적을 찾습니다. 이민자나 소수자가 쉽게 그 대상이 되며, 집단 심리는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을 타고 더 빠르게 퍼져나갑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주장과 의견만 접하게 되고, 반대되는 관점은 점점 차단됩니다.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믿음만 점점 더 굳어지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은 흐려집니다. 결국 편향은 점점 강해지고, 현실 감각은 왜곡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극단주의는 단순한 개인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불안을 흡수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와 제도의 취약성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단순히 비난하거나 억누르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불안을 관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복잡한 현실을 견뎌낼 문화적 성숙이 필요합니다.
극단적 편향은 결국 우리 사회가 불안을 다루는 방식이 어디까지 한계에 부딪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단순히 남의 문제처럼 경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와 사회 전체가 가진 불안을 비추는 거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극단적 사고가 자리를 넓히는 것을 막고, 더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