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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람

by 최정식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기지를 다시 차지해야 한다는 의중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국제사회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제안이라기보다, 철수 당시의 굴욕적인 장면과 대비해 미국이 다시 힘을 보여주려는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그람은 단순한 군사 시설을 넘어, 제국들의 흔적이 쌓인 공간입니다. 기원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정을 마치며 요충지로 삼았고, 이후 몽골 제국과 무굴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도 중요한 군사적·교역적 거점이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는 소련이 1979년 아프간 침공 당시 바그람을 핵심 군사기지로 확장하며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잇는 전략적 교두보로 삼았습니다. 미국 역시 2001년 9·11 테러 이후 아프간에 개입하면서 바그람을 전쟁 지휘본부이자 미군의 최대 주둔지로 활용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바그람은 아프간을 지배하는 세력의 심장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불과 몇 해 전 아프간 철수 장면을 기억합니다. 카불 공항에서 혼란스럽게 탈출하는 아프간인들, 장비를 두고 황급히 떠나는 미군의 모습은 세계 최강대국의 위상에 심각한 흠집을 남겼습니다. 베트남 전쟁 말기 사이공 철수 장면을 연상케 하는 그 장면은 동맹국들에게도 “미국은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는 의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바그람 기지를 거론하는 것은 단순히 테러 대응을 넘는 정치적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인 그곳은 중국의 신장, 러시아의 남부, 이란까지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바그람을 다시 확보한다는 것은 곧 중앙아시아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감시 거점을 되찾는 것이며, 동시에 탈레반 지배 아래 굳어진 질서를 흔드는 행위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사실을 활용해 대국 경쟁의 무대에서 미국의 재등장을 알리고, 동시에 민주당 정부의 철수 실패를 비판하며 자신을 강한 지도자로 부각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에 재진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새로운 전쟁을 의미합니다. 군사적 비용과 정치적 부담은 막대합니다. 동맹국들 역시 미국이 또다시 책임을 다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지우기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 중국과 러시아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오는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따라서 실제 실행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발언은 상징적 함의가 큽니다. 강대국은 단순히 군사력을 동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야기를 어떻게 써내려가느냐에 따라 권위가 유지됩니다. 미국이 바그람 기지를 다시 점령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굴욕적 퇴각의 기억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가 핵심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점령”이라는 언어를 통해 패배의 기억을 권력의지로 바꾸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미국이 실제 군사행동보다 ‘이미지의 전쟁’을 벌이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그 전쟁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문제는 미국이 과연 이 이미지 회복을 전략적 신뢰로 이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힘의 과시는 순간일 수 있지만, 책임 있는 행동과 일관된 동맹 관리만이 진정한 권위의 회복을 보장한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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