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앙 투쟁] 당신이 움켜쥔것이 당신을 형성한다

by 글쓰는고양이
당신이 움켜쥔것이 당신을 형성한다.


교회에서 진행하는 아침기도 중 나온 문장이다. 아침기도시간을 통해 삶의 방향, 근원, 지향을 찾으려는 중이다. 보통 기도는 욕망을 투영하여 신에게 소원하고 응답을 받는 공격적인 행위같지만, 이번 아침기도를 통해 욕망을 가라앉히면 잔잔해지는 수면위에 떠오르는 신의 뜻과 지향을 기다리고 발견하는 방어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에게 요구를 들어달라고 떼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을 듣는 행위인 것이다. 덕분에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을까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신, 발견한 신의 지향을 내가 수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닮아간다."


목사님이 내가 사랑하는 것의 모양, 성질을 닮아간다고 했다. 대충 맞는말이려니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건 무엇인지 생각했다. 원하는 것, 원하는 것 같으나 타인이 원하는 것, 원하다 못해 집착하는 것, 원하지 않지만 해야하는 것 등. 순서와 방향 없이 파편화되어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 이 퍼즐 조각들을 신의 지향이라는 구멍에 맞춰보는데 어느하나 기분좋게 들어맞는게 없다. 맞으려면 잘라내고, 깎아내고, 내다버려야한다. 뭐 이렇게 어려운 걸까.


어두운 새벽에 순간 신경질이 났다. 초월자의 지고한 무엇따위를 인간이 닮는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행복한 순간은 얼마나 되며, 당신이 말한 영원은 언제야 누릴 수 있는가. 욕짓거리같은 질문은 인생 내내 나를 괴롭혔다. 결국 다시 뻔한 답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욕망의 관성을 따라 노예가 되어 방향 없이 사는 것보다, 결국 사랑이 답이라고. 현실에 발 붙인 나와, 하늘을 봐야만 숨 쉴수 있는 또 다른 내가 분열을 일으키며 이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신경질은 분노가 되서 온 몸에 퍼졌다. 악이 팽배한 이 세상에 내려온 예수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던가. 예수가 잡았던 사람들의 손은 얼마나 냄새나고 더러웠던가. '그리스도'교라고 자처하는 나의 삶은 너무도 말끔하고, 평온하며, 타인을 위한 아무런 걱정도, 희생도 없다. 눈앞의 결핍과 불안도 견디지 못하고 주류에 묻어 가는 내 삶을 예수가 본다면 뭐라 말할까. 사랑을 위해 고통에 기꺼이 투신할 수 있는 삶이, 나에게는 없다. 예수의 삶을 사는 것은 욕망덩어리인 인간으로서 불가능할지언정, 그리스도의 목숨값을 싸구려로 만든 나는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있는가.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의 역설을 감히 고백할 수 있는가.


-


표류하는 생각들을 불편하게 바라만보다보니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기도라기보다 넋두리와 사색 어느 중간쯤에서 시작되어 분노와 무기력으로 끝났다. 지향을 발견하기는 커녕 고민과 분노가 뒤섞여 어지럽게 흩어졌다. 이 시간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잠깐 회의해보다가, 입 밖으로 소리내기라도 하면 기도 비슷한 것으로 마무리가 될 것 같아 잠시 숨을 멈추고, 아무런 생각을 거치지 않은 문장을 나도 모르게 뱉었다.


"예수가 사랑한 것들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흩어진 조각들 밑의 밑, 깊음의 깊음에서 흔들림 없이 오래 자리잡고 있던, 단 하나의 유일한 지향이었다. 발견한 것 같다. 재발견이다. 갱신이다. 그것은, 인간 예수가 짧은 생애동안 사랑했던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지향이 되어야하는 것이었다.


인간이다. 지독하리만큼 고통스러운 일상과 현실을 살아내야만 하는 연약한 인간이다. 성서는 예수가 사랑한 것은 인간이라고 선명하게 기록한다. 부당한 권력에 눌려있는, 시선과 편견에 난도질 당하는, 효율과 이익이 만든 견고한 시스템에 희생당하는, 존재의 기쁨을 잃어가는 인간. 인간을 사랑한, 나를 사랑한 예수의 삶이 곧 나의 지향이었다.


몇년전까지, 나는 그가 사랑한 것들을 사랑하겠다고 강박적으로 살아냈다. 강박의 결과로 눈앞에 드러난 무겁고 더러운 현실이 너무 버거워서 놓아버렸다. 놓아버렸고 생각했는데, 이미 나의 일부와 전체를 형성하고, 근거짓고, 구성하고 있었다. 사랑하다못해 움켜쥐고, 산산조각난 뒤 거뭇한 재처럼 삶을 지저분하게 뒤덮어버려서 나는 견디지 못했다. 그날 아침 발견한 지향은 그 파편들이었다.


KakaoTalk_20250203_115746877.png 사진: 좋은 친구 하은 / 함께 간 원주 뮤지엄산 어느 곳


몇년만에 그렇게 울었는지 모른다. 한웅재의 '소원'이 생각나서 들었다.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수없이 들었던 노래에서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오름직한 동산이 되겠다고 결단해놓고, 스스로를 기만하며 높이 솟은 산이 되려고 했다. 이제는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동산이 되는 방법을 찾으려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재의 수요일 -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명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