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書와 評論] 소설가 정영희 세 번째 산문집
중견 여류 소설가이면서 완성도 높은 지성 에세이를 선보이고 있는 정영희 작가가 세 번째 수필집 ‘굿모닝, 카르마’를 출간했다. ‘석복수행 중입니다’, ‘콤플렉스 사용설명서’에 이은 연작 형식의 작품이다. 앞선 수필집과 마찬가지로 찰나(刹那)로 스칠 수 있는 일상을 불러 세워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을 특유의 섬세한 언어로 되짚고 있다.
정 작가는 스스로 ‘가톨릭계 부디스트’라 칭할 정도로 생각은 탈 종교적이면서도 글은 종교적, 철학적 사유를 묵직하게 담고 있다. 특히 삶에 있어서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작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를 통해 독자에게 경험의 오류를 줄이는 사변(思辨)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이 수필집의 매력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불환’(不環)을 말한다. 욕망이 존재하는 세계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다. 3초마다 번뇌에 멱살 잡히는 마음을 끄고, 적멸의 강에 이르러야 가능하리라. 눈먼 거북이가 백 년에 한 번 물 위로 올라와, 떠다니는 관자에 머리가 끼일 확률보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더 어렵다는데, 이 귀하고 귀한 생을 탕진하고 있다니. 아, 난 얼마나 더 억겁의 생을 태어나고 태어나서, 이 카르마(karma) 다 갚은 공덕으로 그 강에 닿을까.”
작가의 말 제목조차 ‘마침내 평화롭고 조용하기를’이다. 매화꽃 떨어진 자리에서 썼다는 서문은 ‘간신히, 외롭지도 않고 간신히, 부럽지도 않고 간신히 평화롭고 자유롭다’고 시작했다. 몇 개의 문장 속에 작가가 정서적 ‘해탈’로 성큼 다가선 것을 느낀다. 이면에는 수많은 번민의 날을 보냈다는 것이 읽힌다. 작가의 말 전체가 한 편의 운문이다. 산문을 여는 운문의 함축이 다음 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다.
두 번째 산문집 ‘콤플렉스 사용설명서’에서 작가는 ‘내 말의 무기는 문장이며 내 말의 방패 또한 문장이다. 이쪽과 저쪽을 강요하는 삶과의 투쟁으로 상처투성이인 내 영혼을 지켜주는 창과 방패, 내 속의 문장에게 무릎 꿇어 인사한다, 고맙다고. 오래 걸어온 나는 아직도, 이렇게, 문장으로 내 운명과 조금씩 화해하며 살아내고 있다'고 문장과 화해했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마침내 ‘내 안의 나’를 만나고 있다.
정 작가는 20년 가까이 명리학 연구를 하면서 상담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글 속에서 생활 역학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이번 산문집에도 사주팔자 고치는 법, 신생아 작명의 숭고함 등 명리학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산문집 세 권을 놓고 보면 그의 글쓰기가 공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느낀다. 글쓰기는 생각의 표현이므로 그의 철학과 사고 역시 많은 변화가 감지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황혼이 돼야 철이 나는 자신의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많이 자유로워진 느낌이다.
필자와의 인연도 한 꼭지 담겼다. 경남 통영 통제영 12공방에서 나전칠기 체험 때 만든 젓가락을 SNS에 올렸더니 정 작가는 ‘필우 선생’으로 시작하는 댓글을 남겼다. 갑자기 호가 부르고 싶어 졌다고 했다. 필우(苾旴)는 정 작가가 지어준 호이기에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필자의 잔재주를 칭찬하면서 이쪽 길(나전공예)로 강추한다는 농반진반 글을 이어갔다.
갑자기 정 작가의 호가 궁금해졌다. 남들에게 호를 지어 줄 정도면 분명 작가 본인도 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는 ‘남의 호는 많이 지어주면서 정작 나는 호가 없다. 호를 가진다는 게 어찌 사치스런 혹은 교만하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깔려 있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사주 간명지나 작명증에 두인으로 사용하는 호는 있다고 밝혔다.
그가 쓰고 있는 호는 가현이다. 서예와 서각을 하는 지인 전시회에 갔다가 만난 어느 교수가 볼 때마다 아름다워진다면 아름다울 가(佳) 자를 줬고 그러자 옆에 있는 서예가가 늘 현재가 아름답다며 현재 현(現) 자를 줘서 만들어진 호다. 십여 년을 두인으로 썼지만 누구에게도 기원(起源)을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늘 매화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매산리로 이사를 했고 어느 순간 ‘매은’(梅隱)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싹트고 있었다.
정 작가는 야심한 밤 요가 가부좌를 튼 채 초은, 다은, 매은 등 어떤 것을 호로 사용할까 고민하는 자신을 보면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고 했다. 초은은 예쁘긴 하지만 풀 뒤에 사람이 숨는 건 아닌 듯해서 매화꽃 떨어진 자리에 은거한다는 의미를 담은 매은으로 정하고 필자에게 답글을 달았다.
‘현재는 가현을 쓰고 있지만 노년에는 매은을 쓸까 합니다.' 그는 적요한 밤, 가부좌 틀고 요가를 하며 들숨, 날숨에는 관심도 없이 숯불 위 고기 뒤집듯 혼자 호를 되작이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필우 선생, 제 호는 ’매은‘입니다’라고 글을 맺었다. 정 작가는 노년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그의 글은 여전히 명징(明澄)하고 설득력이 있다. 소설 필력이 산문과 만나 명리학적 글쓰기가 가미되면서 우리 삶을 웅숭깊게 통찰케 한다.
정 작가는 대구 생으로 영남대 미대와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 ‘시문학’에 단편소설 ‘아내에게 들킨 생’을 발표했고 1986년 중편 ‘무무당의 새’로 동서문학상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다. 현재 가락시장 근처에서 영희역학연구원을 운영하며 꾸준히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