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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진 Jan 26. 2024

찾다가 죽게 생겼네.

요한복음 8:21-30

묵상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신다. (21,24)

찾다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들은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믿지 못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혹은 납득할만한 그리스도를 찾았다.

자기기준만 바라보니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도 믿지 못하고 계속 찾는 그들이다.

대체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때야 하는가? 


곧 남편이 실직상태인지 1달이 된다. 

남편은 큐페를 위해 실직했나 싶을만큼 큐페외에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부부목장 목자님이 추천해 준 일자리를 제외하곤 이력서도 한 군데 넣었다. 한 달에 한 군데 넣는게 목표인가? 싶은 지경이다. 


가장 돌 거 같은건 일을 못구하는 것보다그의 태평함이다.

그는 요동치 않는다. 예전에도 그랬다. 

직장도 없고 돈도 없고 한 달에 나오는 양육수당 같은 20만원이 우리 전재산 일때도 그는 요동치 않았다.

그때 남편이 한 말이 기억난다. “내가 돈 안벌어도 우리 지금도 먹고 살고 있잖아.”였다.

당시 여자목장에서는 눈물을 머금으며 나에게 아무 지원도 하지 말라고 모든 목원에게 처방했다.

그리고 나는 아빠한테 전화해 남편이 직업을 얻기 위해 고통스러워도 아무것도 집에 올 때 사오지 말라고 말하라 했다.

그 적용을 하고 얼마안가 우린 볶아먹어 지져먹어 돌려먹던 김치조차 사라져가고 항아리에 쌀이 바닥났다. 말 그대로 바닥났다.

그렇게 되어서야 남편은 일용직을 나가서 간헐적으로라도 일당이라도 벌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내 곧 그것에 안주해 또다시 돌 거 같았다.)


그래서 난 내 가난보다 힘든게 남편의 무감각이다.

그의 감각은 그가 중독된 것들이 통제되는 순간외엔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진 거 같다.

그래서 핸드폰을 못하거나 담배를 못피거나 읽고 있는 소설책을 보지 못하는 상황 외에 

그는 고통도 슬픔도 걱정도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 혹은 하나님이 해결하겠지 주변 사람이 도와주겠지 한다. 

이게 믿음이면 좋은데 믿음이 아니라 믿음인 척 하는 회피의 고백이니 가슴을 칠 노릇이다.



그렇게 남편이 일을 언제 구할지도 모를 일이고, 그리고 이전 직업이 우리 5식구 살기에 너무 버거워서 이직을 준비했던 건데 없는 형편에 용접기능사를 취득해놓고 

이제와서 왜 사회복지만 또 고집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고집스러움 덕분에 나도 일을 알아보고 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몇 년전의 나와 달리 지금의 나는 그래도 일을 하기 훨씬 수월한 환경과 자격을 갖추고 있다.


실직상태로 편안하게 있는 남편에 대한 경험이 몇 년전에 있어봐서 그리고 지금은 내가 이전보다 일할 능력도 갖춰져 있어서 예전만큼 지금 상황이 서글프진 않다.

그렇지만 눈을 감고 내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렵고, 걱정되고를 넘어서 말그대로 공포가 날 덮친다.

공포가 날 왜 덮칠까에 대해 기도하고 묵상해봤다.


Q. 나는 왜 일하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가?


그 안에는 나의 끔찍한 나르시시즘이 있음을 알았다.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잃는게 공포스러운 거라는 걸 알았다.

‘남편은 일하고 나는 살림하고 집을 반짝반짝 가꾸고 아이들을 돌보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들을 하는 것’이 현 시점 바라는 거다.


세상 기준으로 봐서 내가 바라는게 남편이 바라는 것보다 고차원 적으로 보일 뿐 별반 다를게 없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남편도 결국 자기가 원하는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고 그것에 대해서만 감각을 느끼며

나도 결국 내가 원하는게 제일 중요해 그것을 잃는 것에서  감각을 느끼는 거다.

다른 듯 하지만 남편도 나도 같은 거란 생각이 든다.


내 바램이 남편으로 인해 와장창 깨져버려서 나는 남편에게 화가 난다.

내 꿈 때문에 ‘남편은 어떠해야 함’을 들이대는 건 결국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생각하는 이상의 그리스도를 예수님께 들이대며 어떠해야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아 보인다. (21)


이런 남편이 남편임을 믿지 아니하고 내가 원하는 남편을 바라면 나또한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 믿음이 어려워 소망은 버리고 포기하듯 용납하는게 아닌 있는 그대로 사랑을 잃지 않는 온전한 수용이 필요한데

나한테는 그럴 힘이 쥐뿔도 없다. 

인자를 든 후에야 예수님이 그인 줄 아는 자들처럼 나또한 뭔가 삶 가운데서 치러지는 것들이 없으면 깨달음이 없다.(28)


그래도 후에라도 알게 하심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들은 인자가 든 후에라도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죄 가운데서 죽지 않는 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나또한 내가 원하는 것만 찾다가 죽지 않길 기도한다. 그냥 하루씩 만이라도 생명을 살 수 있길 기도한다.

그렇게 매일 삶에 대한 일용할 양식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주님이 주시길 기도한다.


   

남편의 속도나 나와 다름이 돌아버릴 거 같을 때는 잔소리가 아닌 기도하겠습니다. 

두렵다고 계속 미루지 않고 도교육청에 인력풀 등록도 시키고 일자리도 꾸준히 알아보기


기도

하나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이직 준비를 했는데 더 나은 삶이 아니라 더 죽을 거 같은 삶이 되어 버렸네요. 지금은 과정인데 마치 이것이 제 삶의 결론인 것처럼 비극을 맛보고 있는 제가 제일 불행인거 같습니다. 주님, 보고싶은 것을 보고 그것이 없다 공포와 분노를 느낄 것이 아니라 봐야 할 것을 보길 기도합니다. 남편을 옆에 두고서 내가 바라는 남편의 모습을 찾지 않게 저를 인도하시고 나의 원함 때문에 집안에만 머무르는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제게 허락해 주세요. 주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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