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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가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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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사람이 언제 어디서 죽을지 정해 지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 머물기도 하고 여기저기 여행 다니기도 한다.

내가 이스탄불에서 살 때 관광으로 온 일행 중 한 사람이 아침에 호텔방에서 쓰러져 있어서

다들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다.

평소 고혈압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왜 혈압약도 먹지 않았는지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었다. 해외여행 중에 돌연사를 하면 수속이 말도 못 하게 복잡하다.

하루 앞일을 모르는 인생이여.


나의 부친도 고혈압 환자셨는데 당신을 위해서는 돈을 안 쓰시고 자식들에게는 아낌없이 주셨는데 평소에 농담처럼 자식들한테 부담주기 싫어서 '길거리에서 돌베개(?) 베고 죽겠다'라고 하셨다.

어릴 때라 뜻을 잘 몰랐는데 객사 아닌가?

겨울에 은행에 가셨다가 은행 문을 여는 순간 밖은 차고 실내는 더워서 기온 차였는지 갑자기 쓰러지신 후 앰뷸런스로 이동 중 차 안에서 돌아가셨다. 74세에. 너무 건강하셔서 칠순도 필요 없고 팔순 잔치도 할까 말까 호통을 치셨는데.


모친은 평소에 '자다가 갔으면 좋겠다'라고 늘 되뇌셨다. 그대로 되셨다.

나는 이스탄불에서 동생의 전화를 통해서 비보를 들었다. 온갖 병에도 꿋꿋하게 여러 고비를 버티시며 강인한 정신력으로 살아내셔서 별명이 불사조.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셨어도 한 번도 '아파서 죽겠다'라는 말을 하신 적이 없다.

끝까지 자식들에게 어리광이나 엄살도 없으셨고.

새벽에 동생한테 전화로 숨 쉬기가 힘들다고 하셔서 급히 가보니 이미 침대에서 주무시듯 반듯하게 누워 계셨는데 이미 돌아가셨다고.

당뇨로 점점 말라가시던 중에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모습은 너무 새색시처럼 피부도 뽀얗고 몸피도 늘어나서 젊은 시절의 엄마 모습이었다고 동생이 언니도 봤으면 마음이 편했을 거라고. 항상 말씀하시던 대로 주무시다 고통 없이 가셨다. 그날 낮에 노인들 피크닉에서 풍선 들고 찍으신 사진이 마지막일 줄이야.


해외에 살면 항상 불효자 불효녀가 된다. 임종은커녕 장례식 일정 맞추기도 바쁘니까.


갑작스러운 가족들의 죽음, 즉 돌연사 앞에서

전화로 앰뷸런스를 부를 때 '죽었다'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된다고 한다.

비록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라 할지라도.

왜냐하면 생과 사의 여부는 앰뷸런스로 온 패러메딕 요원들이 검사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황망해서 전화로 '돌아가셨어요'라고 하려고 하지만 대신에 " 숨을 안 쉰다'라고 해야 한다고.

그래서 요원들이 올라와서 당사자를 보는 중에 다른 사람은 반드시 냉장고 문짝을 본다는데.

한국 사람들은 냉장고 문에 마그네틱으로 뭔가를 더덕더덕 붙여 놓는 짓(?)을 거의 안 하는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냉장고 문이 게시판이요 스케줄판 내지는 사진첩이다.

서양집에 가 보면 냉장고 문인지 칠판인지 모를 정도로 빼꼭하니 다 큰 사춘기 애들의 담요 쓰고 있는 백일 사진부터 돌사진까지 잔뜩 붙어있다.

패라메딕 사람들이 냉장고 문짝을 스캔하는 이유는 거주자들의 연락처와 의료 정보들을 붙여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생명연장 거부에 서명한 사람들은 그 서류를 냉장고에 붙여 놓았는지도.

평소 먹던 약들이 침대 옆에 있는지 식탁 위에 있는지 모르니까 알아내려면 시간이 걸리므로.

한 번은 친구 집에 갔더니 둥근 소반에 약병이 수십 개가 가득 있었는데 무슨 약을 언제 먹는지 본인들은 알겠지만 살아있을 때나 물어볼 수 있으니....


냉장고 안의 음식물은 그 사람을 살게 하고 냉장고 밖 문짝의 정보는 죽어서 필요하니 냉장고가 참으로 중요하네.


영양제는 차치하고라도 처방약 이름과 하루 양 정도는 메모를 해서 붙여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요즘처럼 대가족은커녕 결혼 안 한 자녀들도 독립해서 나가서 사는, 서로서로 고독사해도 이상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더욱.

부모가 무슨 지병이 있는지야 대충 알겠지만

처방약은 이름조차 힘들고 몇 mg인지는 더더욱 모를 테니.

싱글 자녀들이 혈혈단신 자취하는 경우 복합적인 스트레스로 불안이나 수면장애로 약을 먹는지 조차도 모르는 부모도 많다. 가부장 제도의 늙은 부모들에겐 자녀가 정신과 약을 먹는다고 하면 마치 족보에도 없는 정신병에 걸린 걸로 생각해서 난리가 난다. 그래서 말을 하면 위로는커녕 더 스트레스가 쌓이니까 아예 말을 안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딴살림 딴생각으로 살다가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하면

황망하기 그지없다.

평소 복약의 내용만이라도 간단하게 메모해서 냉장고 문짝에 붙여 놓는 것이 민폐를 덜어주는

굿 아이디어.


오늘도 침묵의 시간들이 스산한 계절을 타고 서서히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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