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는 어떻게 북유럽의 국민 물고기가 되었나

북유럽의 역사를 뒤흔든 물고기

by 식별


중세초에는 인근에 어장이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도원이 아닌이상 해산물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물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귀족계층만의 특권이었다. 특히 철갑상어는 당시의 최고급 사치 물고기로서 임금님 식탁에나 진상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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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세계에서 로마 제국이 몰락함에 따라 근해 수역에 대한 통제와 어획량은 급감하기 시작했다. 염장 처리가 되지 않은 신선한 물고기는 부자나 귀족, 혹은 식량을 자급하는 몇몇 운좋은 이들만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단백질은 주로 육고기를 통해 보충되었다. 제국 시절 다양한 이름으로 일컬어졌던 바다 생물들은 오직 '물고기'라는 이름 하나로 환원되었으며, (당연하게도 돌고래는 '물고기'였다.) 어업의 중심지는 유럽의 북쪽 지역으로 옮겨갔다.


기후가 따뜻해지는 중세 온난기(MWP: c. 950~c. 1250)에 접어들자, 인구 폭증으로 인해 남쪽 지역에서도 물고기를 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도로와 시장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절인 생선들이 운반되었으며, 내륙일지라도 귀족들의 양식장에서는 잉어와 창꼬치가 뛰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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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 기술 개선에 따라 내륙 지역에서의 양어지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유라시아 잉어(Cyprinus carpio) 양식은 특히 14세기 중반 이후 수도사와 귀족들에 의해 확대되었고, 15세기의 잉어 가격은 1킬로그램당 소고기 9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상당한 고가였다. 잉어는 한동안 황금알을 낳았지만, 15세기 이후에는 북쪽의 바닷물고기 어업이 번성함에 따라 자연스레 쇠퇴했다.




북유럽의 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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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를 값싸게 대체하며 급부상한 북쪽의 물고기는 대서양 청어(Clupea harengus)였다. 대서양 청어는 왕성한 번식력으로 유명하여 '바다의 개미'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복잡한 산란주기에 따라 북해 주위의 근해를 찾아오고, 어부들은 어획기에 맞춰 배를 타고 그들을 맞는다. 청어 떼는 알을 낳기 위해 파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밀려오고, 일대의 수면은 청어의 정액으로 부예진다.


북해와 발트해 지역에서는 알을 낳으려 근해를 찾아온 수천의 청어떼가 인간들에게 잡혀 곧바로 소금에 절여지곤 했다. 노르웨이 북쪽의 로포텐 제도는 대구와 청어의 어장이 분포해 있어 중세시대 이전부터 어업이 발달했다. 이곳 군장들의 옛 무덤에서는 철기와 함께 막대한 양의 청어가 함께 출토되며, 전사들의 유해에서도 염장 청어가 확인된다. 청어는 수도원의 회계장부에도, 이교도들의 사가에도 등장했다. 심지어 바이킹의 진출 경로와 청어의 회유 경로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주장마저 존재한다.


청어는 매우 기름지기에 금방 썩어버리고, 바람에 말려 건조시킬 수도 없다. 청어를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염장이었는데, 원시적인 당대의 소금 생산법으로는 청어를 염장하기 위한 소금 수요를 맞출 수 없었다. 따라서 조잡하게 염장된 청어는 겨우 2주 정도밖에 버틸 수 없었다. 청어를 먹고 식중독으로 사망하는 이들이 꾸준히 속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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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의 가공: 청어의 내장을 제거한 뒤 소금에 절여 통 안에 채워넣는다. 열흘간 숙성되어 부피가 줄어들면 그만큼 청어를 추가로 절여 넣는다. 크기가 지나치게 작거나 산란 직후의 저품질 청어는 솎아내 구별되는 통에 담는다.


그러나 중세 이후, 덴마크의 어부들은 청어의 아가미를 떼낸 뒤 즉시 염장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이 방식을 사용하면 청어의 혈류 속에 스며든 염분이 내장 곳곳에 퍼져 훨씬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다. 소금 품질의 지속적인 개선 또한 보존을 용이하게 했다. 마침내 통 속에 넣어 보존하는 새로운 방식이 등장하자, 청어 보존 기간은 최대 2년으로 늘었고, 본격적인 청어 교역의 시대가 열렸다.


사순절 시기에는 금욕을 하며 식물성 식품과 물고기만을 먹어야한다는 기독교의 새로운 전통은 물고기 수요를 늘렸는데, 중세 후기에 이를수록 연중 금욕일이 계속해서 늘어남에 따라 물고기의 수요도 그에 맞추어 늘어났다. 북유럽에도 기독교 전통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자, 물고기를 잡는 것은 교리상 성스러운 일이라는 의식이 탄생했다. 말하자면 어부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동시에 죄도 씻는 셈이었다. 종교적 의무가 더 위험한 어장으로의 항해를 불렀다.



스코네 시장과 뤼베크





13세기 이후 청어 어획은 규모가 훨씬 더 거대해졌고, 이렇게 절여진 청어가 900마리씩 들어가있는 통은 검열관의 품질 보장 마크가 찍힌 채로 내륙 지대로 운송되어 거대한 물고기 상업 네트워크의 북쪽 축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내륙 도시의 끝모를 수요를 맞춰주기 위해 북유럽 어부들은 매년 예닐곱 명 정도의 크루를 꾸려 그물을 가지고 바다로 갔다.


북유럽의 스코네 청어 어시장과 한자동맹의 뤼베크 자유시가 발트해 청어무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스코네 어시장의 정확한 위치는 청어의 산란 위치에 따라 매년 바뀌었지만, 주로 스코네 지방의 스카뇌르와 팔스테르보 사이 어딘가에서 두 달간 장이 열리곤 했다. 팔스테르보의 어원 자체가 생산좌판과 관련 있었다.





뤼베크의 상인들은 뤼네부르크에서 소금과 청어용 통을 수입해, 스코네 어시장에 제공했다. 상품과 함께 많은 뤼베크 여성들이 청어 손질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했다. 협동이 긴밀해질수록 청어 무역에 관련된 모든 이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당대의 상황을 두고, 뤼베크의 연대기 작가 아르놀트는 "덴마크인들이 스카니아 해안에서 매년마다 청어를 잡아와서 모두가 부자가 되었다."고 기술할 정도였다.


14세기에 이르면 뤼베크는 이 때부터 쌓은 부를 통해 한자 동맹의 여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다섯 영광 중 하나로 불리게 된다. (나머지 네 영광은 베네치아, 로마, 피사, 피렌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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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한자동맹의 무역에 쓰였던 배는 코그(Cog)라고 불렸던 소형 범선이었는데, 클링커 방식으로 건조된 이전 시대의 바이킹 선박 크나르(Knarr)를 대체했다. 코그선의 화물 적재량 증가가 13세기 중반 이후부터 급격하게 진행되었고, 그것이 한자 무역의 발달을 이끌어내는 주된 동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이 배들은 심지어 잉글랜드나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가닿아서 청어를 팔았다.


그러나 한자 동맹의 청어 독점 세월은 영원하지 못했다. 청어떼가 회유 경로를 갑작스레 바꾸었기 때문이다.




청어 뼈 위에 세워진 나라




청어가 회유 경로를 바꾸자, 네덜란드가 새로운 청어 상업망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네덜란드는 어떻게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까?



본래 북유럽의 스코네 해안에서는 연안에서 끓어 넘치는 청어를 퍼올려서 곧바로 인근의 항구에서 가공을 하는 간단한 과정을 거쳤다. 반면 환경이 따라주지 않은 네덜란드인은 더 어려운 방식을 울며 겨자먹기로 채택해야했다. 청어가 앞 바다에 알아서 오길 기다리지 않고, 직접 먼 바다의 청어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던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행해진 것이었으나, 회유 경로가 바뀐 지금은 도리어 기회가 되었다. 자연은 무시무시한 변덕을 부려 (스코네 어시장과 뤼베크 자유시의 번영을 포함한)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지만, 동시에 어떤 인간들은 그 변덕 이전에 미리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의 준비는 환경의 유불리마저 뒤집을 수 있다. 마치 서쪽 변방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 지중해 무역에서 소외되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지리 상의 발견을 주도 한 뒤 자신들의 환경을 '신대륙에 가장 가까운 전초기지'로 바꾸어 놓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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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새로 도입된 뷔스(buss)라는 원양 어선은 대선단을 이루어 장관을 펼쳤다. 이 배들은 길이 약 20m에 배수량은 거의 100톤에 달하지만 무엇보다 민첩하고 안정성이 높았다.





해군의 호위를 받는 선단



뷔스 선단은 무려 400~500척 규모로 어장에 향했는데, 타 국가(특히 영국)의 어선 나포를 방지하기 위해 해군 선박의 호위를 대동하였다. 이것이 바로 네덜란드의 국운을 건 위대한 어업(Great Fishery)이었다.


뷔스 선단은 이동하는 청어들을 따라 스코틀랜드 북부의 셰틀랜드 제도에서 시작하여, 영국 동해안에 위치한 도거 뱅크와 도버 해협을 거쳐 아일랜드 인근 해역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움직이며 조업을 했다. 그렇게 잡은 청어는 곧바로 갑판 위에서 내장이 제거되어 보존성을 높였다.






청어의 바닷길을 따라 형성된 어시장 근처 모래벌판 각지에는 임시 움막이 세워져, 그곳에서 어린아이들이 청어의 내장을 제거하고 염장해서 통에 차곡차곡 담았다. 숙달된 작업자들은 무려 1분에 청어 40마리의 내장을 처리할 수 있었는데, 한 순간의 실수로도 평생 불구가 될 수 있었다.


점차 네덜란드의 여러 어촌들이 서로 연합하여 대어장에서의 어획, 보존, 그리고 유통 일체를 독점하기 시작했다. 십수명 가량이 승선할 수 있는 뷔스는 17세기초에 이르면 무려 800여 척이었고, 청어잡이에 종사하는 어부의 수만 하더라도 1만에 육박했다. 한 해에 3만여 통이 넘는 청어가 쏟아져나왔다.


네덜란드의 청어 어획은 국책사업이니만큼 체계적이고 철저한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정부와 어업협회는 청어잡이에 대한 세세한 규칙을 하나하나 지정하여 품질을 보장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통에 청어를 몇 마리 담는지는 물론이고, 그 통을 어떤 크기의 널빤지를 몇 개 사용하는지, 그물눈의 크기는 어느정도여야하는지 모든 것이 규정에 따라 이루어졌다. 네덜란드는 청어 뼈 위에 건설되었지만, 청어 어업은 네덜란드에 의해 주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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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인은 청어 무역으로 얻은 이익을 다른 영역인 대서양의 노예 무역, 동방의 향신료 무역, 그리고 금융업에 재투자하였다. 스페인으로부터의 속박을 끊고 독립하는 과정(80년 전쟁)에서 네덜란드인은 갖가지 사전회사(社前會社, Voorcompagnie)들을 설립하여 이익될만한 곳이라면 세계 어디든 들쑤시게 되었다. 어떤 사전회사는 포르투갈의 후추 무역 독점을 파괴하는 데 전념했는데 투자자들에게 투자금을 네 배로 돌려주었다.





동인도 회사 본사



17세기는 이름하야 네덜란드 황금기(Dutch Golden Age)였다. 1602년, 정부 주도하에 여러 사전회사들이 헤쳐모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가 설립되었으며, 그 직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출범하여 전국민의 투자를 촉진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훗날 자체적인 주화를 주조하고, 독자적으로 식민지를 전개하고, 전쟁을 선포하고, 범죄자들을 처형시키는 등 국가에 준하는 권력을 휘두르며 아시아의 해외 무역에서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무릎 꿇릴 터였다.


그러나 영국은 자기네들 앞바다에서 부를 싹쓸이 해가는 네덜란드를 가만 보고 있지 않았다.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항해조례(Navigation Act 1651)를 선포하였다. 항해조례는 콕 짚어 '외국 선박이 절인 생선을 수출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위반하면 몰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청어를 빼앗기느니 전쟁을 선택했다.






끊임없는 영란전쟁, 네덜란드 패권 몰락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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