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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다비 May 29. 2024

로다비 사모님은 헤르미온느

나만 쓰고 다니는 투명망토가 있어


사모님, 사모님을 분명히 예배 중엔 봤는데 끝나고 보면 사라지시고 없더라고요.

그럴 리가, 저 축도 다 끝나고 목사님과 장로님들께 인사도 다 하고 나갔는걸요.


사모님, 사모님은 말 안 듣는 아들이 둘이나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애들을 순식간에 다 챙겨서 빨리 사택으로 들어갈 수가 있어?

저만의 텨텨기술이 있는데요, 생각해 보니 제가 숨어 다니는 게 하루 이틀에 된 게 아니더라고요.




보일 듯 말 듯 안 보이는 월리. 그리고 나



그렇다.

나는 헤르미온느다.

어렸을 때부터 눈에 띄지 않게 다닐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조부는 성격파탄자였다.

집안일은 간질이 있는 아내와 줄줄이 일곱이나 딸린 어린 자식들에게 내팽개쳐 놓은 채, 당신은 자전거를 타고 한량처럼 놀러 다니는 분이셨다. 농부인데 매일 해가 중천에 뜨도록 주무시는 그런 분이었다.

남자라서 그렇게 대단하셔서, 고추를 달고 태어나지 못한 나를 보기만 하시면 "계집년이"라는 욕을 쏟아내셨고, 언짢은 기색을 보이거나 표정이 굳어지면 스무 개에서 조금 개수가 빠진 연을 마구 찾으셨다. 나는 지금까지도 연날리기를 해본 적이 없는데, 조부가 그토록 좋아했던 연이라서 싫었던 것 같다. 내가 정말로 억울했던 건, 나보다 훨씬 어린 장남의 딸과 나보다 먼저 계집년의 계보를 이은 딸의 딸은 욕을 먹지 않았다는 점. 오직 나만이, 만만한 차남의 딸이라서 무방비 폭격을 당했다. 어린이인 내가 쏟아지는 욕의 비를 맞을 때 아무도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눈치를 보느라, 자기는 아니니까, 각자 살아남기 바빴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다녔다. 나의 헤르미온느 투명 망토 기술은 유년기부터 연마한 유서 깊은 기술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나의 조부는 돌아가시던 그날도 한량처럼 약주를 걸치시고 자전거를 타고 비틀비틀 집으로 오시던 길에 실족하여, 생에 처음으로 가장 이른 시간에 논밭에 출근하시면서 종착을 찍으셨다.




망토 덕분일까 생긴 게 워낙에 별 특색이 없는 것일까, 교회를 한 3년은 넘게 다녀야 성도님들이 나를 조금 알아보시곤 하는 것 같다. 오늘은 그래서 생겼던 에피소드다.


한 날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리 몸은 체성분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데, 몸무게나 옷 사이즈보다 지방과 근육량 체성분의 구성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그게 정말 중요하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인바디를 보건소 헬스장에 가면 무료로 측정 받아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곧장 보건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인바디를 재면서 보니, 보건소에 이것저것 좋은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보건소 선생님이 "다비님도 원하면 나오셔서 운동하셔도 돼요" 하셨다. 한 달 회비가 어떻게 되느냐는 내 물음에 선생님은 나라에서 국민건강을 위해 무료로 운영하고 있으니 언제든 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서 사랑방 사모님네 집 문을 두드렸다. 오늘도 여유롭게 티타임을 갖고 계신 우리 언니들. 제가 빅뉴스를 가지고 왔어요!


아 글쎄, 보건소에 가면 무료로 인바디도 재주고 헬스도 이용할 수 있대요! 우리 같이 가서 운동해요!


내가 소식을 전하자, 사랑방 사모님이 "거기 우리 권사님들 많을걸?" 하셨다. "아니야, 사모님. 내가 오늘 아침에 한참 거기 있다 왔는데, 아무도 없어. 조용하고 좋아요~ 갑시다!" 이렇게 해서 막내가 선배 사모님들을 줄줄이 이끌고 담날 보건소 헬스장으로 위풍당당하게 레깅스 차림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운동을 막 시작하려는데, "아이고~ 사모님들 다 같이 운동하러 오셨네?" 하며 언니 사모님들을 알아보고 말을 거시는 분들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출현하기 시작하셨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투명 망토가 있어서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못 보는 중에, 레깅스 차림으로 혼자만 당할 수 없었던 사랑방 사모님이 "아 여기는 이번에 새로 오신 (벌써 2년 전에 왔다구요) 이 목사님 사모님이세요" 하고 나를 동네방네 다 소개를 해 주셨다.




#심지어 나보다 뒤에 부임하사모님권사님들께서 다들 먼저 알아보심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그냥 혼자 다닐걸


#어떻게 오셨냐며 처음 오셨느냐며 다정하게 다가와주시는 분이 요즘도 가끔 계시답니다

#숨어다니기의 달인





[그많은 목사의 아내들] 시리즈 30화가 어느덧 오늘로 연재가 끝났습니다. 이제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은 부끄럽지만 솔직한 저의 좌충우돌 성장기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교회 어딘가를 조용히 떠돌며 내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며 우당탕탕 성장해 가겠지요.
그리고 지금 저는 심부자궁내막증 수술을 위해 입원해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 발행일인 금요일을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미리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마음에 감동이 생기신다면, 저의 안위를 위해 잠깐이나마 기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부디 이 병의 종착지에 다다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나면 [벌써 세 번째 자궁내막증 수술] 매거진으로 씩씩하게 돌아오도록 할게요.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모든 분께 신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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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저는 당신의 라이킷을 기다립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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