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온디맨드 생산과 순환 소비로 낭비를 재설계하다.

by JJ

패션은 인간의 정체성과 욕망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산업이자, 동시에 지구 환경에 가장 큰 부담을 주는 영역 중 하나다. 매년 전 세계에서 수십억 벌의 옷이 생산되고, 그중 상당수가 팔리지 못한 채 소각되거나 매립된다. 섬유 생산 과정에서 방대한 물과 화학물질이 사용되며, 의류 폐기물은 매립지와 해양을 뒤덮는다.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은 소비자에게 빠른 만족을 제공했지만, 지구에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패션의 미래는 더 이상 단순히 새로운 스타일을 제안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온디맨드 생산과 순환적 소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데 있다.


온디맨드 생산은 말 그대로 필요한 만큼, 필요한 시점에 생산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는 대량생산과 과잉재고를 줄이는 가장 직접적인 해법이다. AI와 데이터 분석은 소비자의 취향과 수요를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다. 예컨대, 온라인 쇼핑몰의 검색 데이터, SNS의 패션 트렌드, 지역별 날씨 데이터를 결합하면, 특정 지역에서 어떤 아이템이 언제 필요할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생산과 유통을 계획하면, ‘잘 팔리지 않는 옷’을 미리 대량으로 만들어 쌓아두는 낭비를 줄일 수 있다. AI가 패션 산업을 ‘예측 기반의 맞춤 생산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을 실질적으로 구현한 대표적 사례가 일본의 조조타운(ZOZOTOWN) 이다. 조조타운은 ‘ZOZOSUIT’라는 3D 신체 스캔 슈트를 통해 수백만 명의 체형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기반으로 완벽히 맞는 의류를 주문 제작한다. 이 데이터는 AI가 분석하여 개인별 치수 패턴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며, 소비자가 주문하면 바로 그 사람만을 위한 옷이 제작된다. 이렇게 하면 재고가 거의 남지 않고, 반품률도 급격히 줄어든다. 즉, ZOZOTOWN은 ‘데이터 기반 온디맨드 패션’의 실질적 성공 사례로,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달성했다.


ZOZOSUIT_green.jpg ZOZOSUIT, MADE TO MEASURE.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디자인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디자이너는 더 이상 추상적인 트렌드를 무차별적으로 생산하는 대신, 데이터에 기반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필요에 응답한다. 이는 패션을 하나의 ‘공급자 중심 산업’에서 ‘사용자 중심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개인 맞춤형 의류 제작, 3D 프린팅을 통한 소량 생산, 주문 후 즉시 제작되는 ‘제로 재고’ 방식은 모두 이 새로운 흐름을 반영한다. 결국 온디맨드 생산은 패션을 더 가볍고, 더 빠르며, 더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순환적 소비는 이 흐름의 또 다른 축이다. 순환적 소비란 단순히 제품을 소비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쓰고, 고치고, 되돌리고, 나누는 문화를 의미한다. 여기서도 AI와 디지털 기술은 강력한 역할을 한다. 중고 의류 플랫폼은 AI 알고리즘으로 수요와 공급을 연결하고, 블록체인 기반 인증 시스템은 명품 재판매 시장에서 진품 여부를 보장한다. 또한 디지털 패션(virtual fashion)은 물리적 자원을 사용하지 않고 온라인 공간에서 자기 표현을 가능하게 하여, 새로운 형태의 ‘비물질적 소비’를 확산시키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트리뷰트 브랜드(Tribute Brand)가 있다. 트리뷰트 브랜드는 완전히 디지털로 제작된 의류를 증강현실(AR)과 가상 공간에서 착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사용자는 실제 옷을 구입하지 않고도, 자신의 사진이나 아바타에 디지털 의류를 입혀 SNS나 메타버스 공간에서 ‘패션’을 경험한다. 일부 물리 제품에는 NFC 태그가 삽입되어, 실제 의류와 디지털 아이템이 연결되는 하이브리드 소비 구조를 실험 중이다. 이는 물리적 소비를 줄이면서, 새로운 방식의 자기 표현과 패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네덜란드의 더 패브리컨트(The Fabricant)는 물리적 옷을 전혀 생산하지 않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 패션 하우스다. 이들은 AI 기반 3D 디자인을 통해 실제 존재하지 않는 옷을 만들고, 이를 가상 공간에서 착용하거나 NFT 형태로 판매한다. 다양한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해 ‘디지털 런웨이’, ‘가상 패션 캠페인’, ‘메타버스 전용 컬렉션’을 제작하며, 패션의 물리적 한계를 해체하고 있다. 더 패브리컨트의 철학은 명확하다 — “옷은 존재하지 않아도 패션은 존재할 수 있다.” 이는 패션의 본질을 ‘소유’에서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더-패브리컨트_green.jpg The Fabricant.


순환적 소비는 또한 미학의 차원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낡은 옷을 수선하여 다시 입는 리페어 디자인, 여러 벌의 옷을 재조합해 새로운 의상을 만드는 업사이클링은 단순한 절약이 아니라, 개성과 창의성의 표현이 된다. 한국의 RE;CODE는 대표적인 예다. 이 브랜드는 자동차 에어백, 군복, 폐기된 원단을 재해석하여 전혀 새로운 의류로 탄생시킨다. RE;CODE의 AI 기반 디자인 플랫폼은 폐원단의 색상·질감·크기를 분석하여, 디자이너가 조합 가능한 패턴을 자동 제안한다. 그 결과, ‘쓰레기’로 분류되던 소재들이 고유한 개성을 지닌 새로운 작품으로 되살아난다. 이처럼 패션은 더 이상 ‘한 철 입고 버리는 일회용 미학’이 아니라, 지속과 순환의 미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는 여전히 넘어야 할 벽을 가진다. 소비자의 욕망은 여전히 빠른 트렌드와 저렴한 가격을 원하며, 온디맨드 생산은 속도와 비용에서 대량생산과 경쟁해야 한다. 순환적 소비 역시 문화적 변화 없이는 뿌리내리기 어렵다. 따라서 이 전환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와 인식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교육, 미디어, 정책이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면, 패션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제한된 실험에 머물 수밖에 없다.


패션은 더 이상 ‘빠르게, 많이, 싸게’의 공식으로 지속될 수 없다. 온디맨드 생산은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고, 순환적 소비는 소비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AI와 디지털 기술은 이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도구이며, 디자이너와 소비자는 새로운 가치를 함께 만들어가는 주체가 된다. 결국 패션은 더 이상 유행의 속도를 좇는 산업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문화와 정체성을 직조하는 행위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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