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민 May 16. 2022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절대로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욕구로 보는 나의 상태 진단법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그의 모습에 비춘 우리 안의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절대로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문구이다. 여러 번 읽었던 그 소설은 읽을 때마다 내게 다른 문장을 선물했다.

이 문장은 스스로를 진단하게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스스로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질 때, 그 근원을 짐작하는 데 그칠 뿐이지만 우리는 자신을 관찰할 시간이 무척이나 많다. 귀를 기울인다면 말이다.


친구 부부와 약속으로 과천에 있는 서울 대공원에 다녀왔다. 처음 가본 곳이었지만 어릴 적 추억들을 싸잡아 모아놓은 앨범 같은 곳이었다.

입구엔 솜사탕 3000원, 번데기 따위가 대충 찢은 종이박스에 휘갈겨 쓰여있고, 곳곳에 헬륨가스 풍선과 밀면 움직이는 장난감 등등이 늘어져 있었다.

30년이 지나도 먹히는 건 먹히는 모양이다. 가격이 열 배로 뛰어도, 그것은 어른들의 사정이지 아이들에겐 설명할 방법이 없는 핑계일 뿐.


사자들이 그늘에서 쉬는 것을 통유리로 볼 수 있는 카페가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으니, 건너편 통유리에 다닥다닥 붙어서 사자를 구경하는 많은 인파가 갇혀있는 듯 보였다.

누가 누굴 구경하는 건지, 사자가 불쌍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인간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갇힌 존재에 대한 연민은 내 안의 어떤 점이 자극되어 발현되는 걸까.

왜 나는 마음에 짐이 있는 자를 지나치지 못하는 걸까.

왜 스스로의 의지보다 타인의 부탁이 더 큰 의지를 가져다주는 걸까.


도덕경에서 노자는 인, 예, 충, 효 등의 말은 그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 언급된다고 했다. 무언가가 충분히 이뤄지고 있을 때는 그것에 대한 필요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굉장히 자본주의 적인 해석이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시스템들은 보통 그렇게 만들어진다.


이 말을 반대로 되짚어보면, 나는 갇힌, 마음에 짐이 있는, 그리고 스스로 보다는 타인의 존재에 더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나는 이런 콤플렉스를 깨부수고 살 것인가, 아니면 이 콤플렉스를 동력 삼아 무엇을 도모해 볼 것인가.

콤플렉스와 그로 인한 욕구를 인지하고 그것과 친해져야 한다. 그것은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며, 추방하는 즉시 나는 삐걱거리게 될 것이다.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지금도 그런 말을 내게 해 준 사람에게 고맙기는커녕 뺨을 한 대 후려갈겨 주고 싶다. 진정성이라는 말 자체도 모르겠고,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지 도통 방향을 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몇 날 며칠을 끙끙대며 노트에 진정성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적었다.

그러다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에 수록된 ‘모닝 페이지’라는 자기 명상법을 소개받았다. (사실 당시에 아티스트 웨이를 읽은 것이 아니라 훗날 모닝 페이지가 수록된 책을 찾아서 읽었다.)


과정은 생략하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여자라는 존재에 대해 집착하고 겁먹으며, 내팽개쳐질 바에는 먼저 마음이 식어버리는 현상이 고작 3살 때 겪은 일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썸 타던 상대에게 갑자기 마음이 식어버린다거나 하는, 내가 컨트롤하지 못하는 내 마음 때문에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자책하고, 주변에서도 그런 인식들이 생기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런 마음을 숨기다 보니 나는 참 모순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던 것이다.


많은 책과 글을 찾아봤지만, 자신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하라는 말만 있을 뿐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더라.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이 3살에 머물러 있다고, 엄만 맨발로 집을 쫓겨나듯 나가버리고(내 입장에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나를 버리고) 아버지는 나를 친척 집을 찾아다니며 맡기려 했지만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던 고작 3살 꼬마 아이의 상처 입고 두려운 마음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더니, 마음이 아팠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말 그대로 ‘마음 아픈’ 일이지만, 장기적으로 좋은 현상이다.

머리로 무엇을 해결해 보고자 한들, 우리의 머리는 거기서 거기고, 문제는 반복된다.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거나, 감정이 우리를 이끌 때는 굉장한 의지가 발현된다.


쓰레기 이기주의자라고 자책하던 나를 3살 꼬마로 대체했더니, 연민이 들끓고 나를 위로하고 아이를 바라다보게 되었다.

그 결과로 내가 지금 좋은 관계의 장기 연애를 하고 있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분명 나는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많이 걷고, 명상하고, 책을 읽으라고.

멍청한 조언들을 자주 한다. 사실 이 조언은 그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딱히 다른 방법을 제시할 수가 없다.

스스로를 마주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은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노력으로 이뤄낼 수 있다기보다, 충분히 때가 무르익어 마음이 아파질 때 가능한 일이다.

나의 멍청한 조언은, 바꿔 말하자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무감각해졌는지 따위를 자주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알게 되는 것들이 참 많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익숙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