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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니카 Jan 07. 2022

산봉우리 책방 주인이 되다

2022.1.7 기사96 군산 말랭이 마을에 동네책방 <봄날의 산책>

1월 1일, 정말로 나의 시간은 길어졌다.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길어졌다. 책을 읽고 뭔가를 쓰던 여고 시절의 내가 새해 첫날, 낯선 이에게 책을 추천하는 책방지기가 됐다. 그러니 얼마나 길고 길었던 날인가. 꿈은 결코 꿈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새해 첫날. 오랫동안 기억될 날이었다.

지난 1일, 호랑이가 물고 올 새해의 일출을 보고 싶은 맘에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새벽 6시, 여전히 묵직한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옷을 챙기니 남편도 따랐다. 올해도 코로나로 인해 군산시의 일출 행사들이 모두 사라졌지만 우리 부부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해를 잡아보자고 했다. 


작년에는 선양동이라는 동네의 언덕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맞았다. 월명산의 팔각정에 가면 금강하구와 멀리 오성산에서 올라오는 해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남편의 말에 따랐다. 군산의 월명산에 오르는 코스는 다양한데 팔각정으로 가는 등산로는 처음 가는 길이었다. 도착하니 추운 날씨에 고등학생 4명이 발을 동동거리며 첫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산의 일출시간은 7시 45분. 어느새 금강하구의 잿빛 물결 위로 회색과 보랏빛 기운이 감돌더니 점점 호랑이의 혓바닥 놀림처럼 붉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첫 일출의 위치는 남편이 예상했던 곳에서 벗어나서 고층아파트 기둥의 틈새에서 올라왔다.


함께 일출을 보고 있던 학생들은 주변의 지형과 부조화를 이루는 아파트 때문에 첫 일출의 광경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그 아쉬움은 일출을 보며 새해 소망을 기도했던 사람들 모두에게 같은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어둠을 물리치는 붉은 정기는 어느새 세상을 밝혀주었고 새해 첫날을 안겨주었다. 그사이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서로 새해인사와 덕담을 나누었다. 나도 학생들에게 덕담을 던지며 무슨 소망을 빌었는지 물었다.


'좋은 대학을 가고 싶어요', '코로나가 빨리 사라지면 좋겠죠' 등의 소담스러운 소망을 말하는 아들 같은 학생들이 사랑스러웠다. 점점 올라오는 해를 보며 손을 들어 가위바위보를 하며 함성을 지르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허락받고 사진에 담았다.


며칠 전 나는 변함없이 올해 이루고 싶은 일을 버킷리스크에 적었었다. 머릿속으로 그것들을 헤아리며 소망했다. 1월 1일의 소망으로는 '2022년 1월 1일, 일년 중 가장 긴 시간으로 기억하게 해주세요'라고 적었다. 나는 새해 첫날이 아주 길게 느껴질 만큼, 시간을 잘게 자르며 움직였다. 일출 구경을 뒤로 하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바로 나의 새 둥지였다.


어제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내 이름이 적힌 '사업자등록증' 하나를 받았다. 종목은 서점과 꽃집이다. 주변의 글을 쓰는 문우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꼭 갖고 싶어하는 공간 하나가 있다.


'여유가 있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의 일등은 동네책방 주인이 되는 거예요.'


 나도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년 전부터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면서 그 꿈을 꼭 이루고 싶었다. 해마다 새해 계획 공책에 그 꿈을 썼다. 어느새 재작년이 된 그해에도 썼고 작년에도 썼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약 한 달 전, 군산시에서 말랭이마을에 문화예술인 입주 공모를 한다는 안내문을 보았다. 처음에는 나의 자격을 의심하며 후배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문화예술인이야? 음악도 그림도 특별한 재능이 없는데."

"아니예요. 여기 신청자격란에 '작가'라는 글이 있잖아요. 선생님은 책을 두 권 낸 작가잖아요."


후배의 말에 정말 '헉'하면서 '내가 무슨 작가야. 웃기잖아' 했더니 '작가 맞아요. 혹시 모르니 신청서 내봐요. 책방하고 싶어하잖아요' 한다. 불안한 동요도 잠깐, 공모신청서를 냈다.


일주일 뒤 공모신청자들에 대한 시 관계자들의 면접이 있었다. 나는 나이가 가장 많았고, 젊은 청년들, 음악, 미술, 도예, 영상, 마술 등에 재능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았다. 나는 면접 때 대답할 얘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귀향을 한 지 20년이 되었네요. 어쩌다 글을 쓰는 일도 하고 책도 냈지요. 그러다보니 우리 고장에 글을 쓰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가까운 전주에 비해 군산은 유독 책방이 적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랭이마을(산봉우리마을)에 작은 책방을 열고 싶고요, 지역민은 누구나 와서 차 한 잔, 꽃 화분 하나 들고 세상 이야기를 하는 공간으로 열어두고 싶습니다."


산봉우리에 책방이라! 면접관 중 한두 명은 아이디어가 신선하다고 공감해줬다. 책방을 열면 어떤 주제의 책을 판매하는지, 어떤 특별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건지, 책방 홍보는 어떻게 할 건지 등의 질문들이 있었다. 시와 에세이, 인문학책을 중심으로 준비하고, 지역 작가들부터 지역민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각종 SNS를 통한 온라인 홍보를 활용하겠다고 답했다.


공모 결과를 기다리면서 종종 꿈을 꾸었다. 젊은이들 속에서 나이 든 아줌마가 펼친 동네책방.


사흘 뒤, 문자가 왔다. 공모에 합격했다고 군산시와 입주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꿈이 현실이 되었다. 너무 기뻤지만 들뜨지는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꿈의 실천을 다시 계획했다.


입주계약서를 작성한 날, 지인들에게 최근 나의 일상을 공개했다. 모두가 놀라워했고, 축하해주었다. 계획을 하면 반드시 이루려는 나의 의지가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달라고 했다. 에세이 문우들과 오래된 나의 지인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7평짜리 공간이라고 해서 사전에 보지도 않고 공모했는데 막상 계약 후 가보니, 벽이 가로 놓인 3평짜리 두 칸의 방. '아고야, 이렇게 좁은데 어떻게 책방을 차리냐'라는 가족들의 낙담 소리. 그런데 나의 장기가 바로 일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방을 챙기면 되겠네!


송년의 마지막 날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종이 한 장으로 나를 더 긴장시켰다. 책방의 이름은 지인 50여 명이 자진하여 이름 공모를 해주어서 얻었다. '동네책방, 봄날의 산책'. 


봄날 봉우리에 있는 방으로 산책길을 열어두세요. 벚꽃 만발한 월명산 말랭이 마을에서 봄날  으로 당신의 마음을 채워보세요. 당신을 위해 차와 꽃을 준비한 '봄날의 산책'.


 책방의 의미를 부여하고 등록증 사진을 지인들에게 보냈다. 번갯불에 콩 튀겨먹을 만큼 빠른 일 처리 속도에 아마도 걱정 반 기대 반일 거다. 새해 첫날, 나를 가장 믿어주는 지인들이 첫 방문자가 되었다. 빈 공간에서 중년여자 셋이 바라본 곳은 바로 우리를 동창으로 만들어준 군산여고와 월명산 능선. 비밀의 방 같은 공간이 생긴 거라고 연신 좋아했다.


1월 1일, 정말로 나의 시간은 길어졌다.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길어졌다. 책을 읽고 뭔가를 쓰던 여고 시절의 내가 새해 첫날, 낯선 이에게 책을 추천하는 책방지기가 됐다. 그러니 얼마나 길고 길었던 날인가. 꿈은 결코 꿈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새해 첫날. 오랫동안 기억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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