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6월의 기억
때는 바야흐로 1991년 6월 초
어느 토요일, 고3 때였다.
교실 뒷자리에서
1교시 가사 수업을 준비하던 막간의 시간에,
당시 좀 논다는 아이들이
거울 앞에서 머리와 옷을 서로 뽐내고 있었다.
그중 학생부 소속 40대 K 여교사로부터
꼬불꼬불 핀컬파마한 머리를 풀고 오라는 지시를
며칠 전 받았음에도 그대로 등교한 H도 껴있었다.
1교시 옆반 교련과목 수업을 위해
복도를 걸어오던 K교사는
저만치 창문너머로 H와 눈이 마주쳤고,
흠칫 놀란 H는 앞쪽으로
쪼르르 달려 나가 교탁 밑에 숨었다.
뒷문을 열고 들어온 K교사의 시야에 H가 보이지 않자,
뒷문 근처 앉아있던, 반장인 나를 일으켜 세워
H가 어디 갔느냐고 다그쳤다.
책보던 중 엉거주춤 일어난 내 시야에도
H는 보이지 않았기에,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때 앞문을 열고 등장한 가사선생님은
뒤쪽의 낯선 대치 상황을 바라보며
교탁 앞으로 다가섰다가
그 아래 웅크린 H를 발견하고
너 왜 거기 들어가 있냐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자 K교사는 반장을 비롯한 이 학급 아이들이
작당해서 H를 숨기고 자기를 속인 거라고 분노하며,
육중한 몸무게를 실어
내 머리를 세게 여러 차례 주먹과 손바닥으로 가격한 후
H에게 달려가 머리채를 붙잡고 흔들었으며,
옆반 수업 마치고 다시 올 테니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고 호령했다.
1교시가 끝나고 다시 쳐들어온 K교사는
전원 책상 위로 올라가 무릎 꿇게 했고.
앞자리 아이들부터 맨손으로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잘못했다고 집단으로 흐느꼈다.
이후 나와 부반장과 H는 다시 학생부실로 끌려갔고,
거기서도 H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갖은 욕설과 폭행을 집중적으로 당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너무나 놀라고 당황한 채
귀가한 이후로 계속 머리가 멍하고
귀부분 통증이 계속되었다.
월요일에 가까운 이비인후과를 가보니
고막이 터졌다고 했다.
의사는 누가 여학생을 이렇게까지 때린거나며
전치 8주 상해진단서를 기꺼이 써주겠다고
본인이 더 분노할 정도였다.
이후 K교사는 내가 없던 시간에 우리 집으로 찾아와
자기 남편이 교육청에 있는데 승진에 문제없도록
제발 조용히 넘어가달라고 읍소하며 부탁해 왔다.
이에 유야무야 넘어간 부모님도 나의 편이 아니었고,
공부 잘하는 1등으로 총애해 주던
담임과 각 과목 선생들은
이 상황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싶지 않아 했다.
정년을 코앞에 둔 교장도 쉬쉬 덮으려고만 했다.
그날 우리 반에 있지 않았던 다른 반 친구들도
처음엔 함께 공분하는 듯하다가
교련과목 실기점수와 내신에 연연하며 조용해져 갔다.
아마 3개월 감봉 조치 정도로 처리된 것으로 안다.
그나마 인공고막을 이식한 치료가 적시에 잘되어
내 부상은 겉으로 나아가는 듯싶었지만,
마음 속 불길은 점점 커져가고만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답답한 상황 속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하루하루 망가진 채
겉으로 숨만 쉬고 있었던 어느 날.
고1 때 국어교사로 계셨다가
박사과정 진학으로 학교를 떠나신
S선생님이 학교로 오셔서 나를 찾으셨다.
아마 몇몇 동문 선후배 교사들을 통해
내 얘기를 접하셨던 모양이다.
당시 아무도 전해주지 못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고,
대학을 비롯한 또 다른 세상으로 도약해야겠다는 희망을
그때 씨앗처럼 품게 하셨다.
너를 둘러싼 시련에 무너지지 않고
갈길을 가면 된다는 그 진심 어린 당부 덕분인지,
버티고 버텨서 원하던 대학생이 되기는 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았지만
마음 속의 내상은 곪아만 갔던
그 시기의 부작용은
대학 시기에 일그러진 반항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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