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박수 치듯 깨우세요
30살의 태영을 봤을 때, 이상하게 20년을 이곳에 살았지만, 처음 본 것처럼 낯설었다. 1월 31일 한겨울 다용도실 배수구 물이 태영의 집으로 역류했다. 순식간에 그곳은 빙상경기장이 되었다.
아홉 살의 로빈을 처음 봤을 때, 그 아이가 브루클린 빈민가 출신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다영 ‘리타의 회전목마’
30살의 태영은 창고에 방치되었던 피겨스케이트를 꺼냈다. 목에는 멋진 고드름으로 만든 머플러를 매고 공중 3회전을 했다. 아직도 내 실력은 낡지 않았어.
그러는 순간 넘어져 얼굴에 멍이 들었다. 멍은 처음에는 거무죽죽한 보라색이다가 점점 갈색으로 옅어지더니 노랗게 번지면서 어느덧 사라졌다.
시간이 더 지나면 멍은 황색과 밝은 갈색으로 변하다가 크기가 점차 줄어들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진다.
-우다영 ‘리타의 회전목마’
그러나 태영의 집은 점점 거대한 빙상경기장이 되었다. 어떤 쓰레기 같은 놈이 이곳으로 혹한의 바람을 보낸 거야. 30살의 태양은 얼음을 깨서 전기포트에 넣어 컵라면으로 일주일을 연명했다.
이 쓰레기 같은, 종양 같은
-우다영 ‘리타의 회전목마’
관리소장이 방문하여 원인을 찾았지만, 역류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보험사 직원이 왔으나, 이것은 배상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 문제가 아니라고 회피했다.
로빈이 있길 기대하며 제인의 회전목마 쪽으로 천천히 걸었던 오후들, 선물처럼 그 애를 만날 때마다 기쁘게 주었던 2달러, 한번도 목마를 타는데 쓰지 않았던
-우다영 ‘리타의 회전목마’
30살의 태영은 더이상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다. 그곳으로 훈풍은 깃들지 않았다. 그만 지친 태영은 벽에 걸린 그림을 보았다. 그 그림에서 백 개의 강물이 흘러나왔다. 찰랑거리는 물이 스케이트를 벗은 발목을 간질였다. 동사凍死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아야 돼. 너는 고작 30살이야. 아, 태영은 천만 송이 튤립밭에 누워있는 거야. 훈데바르트바서Hundertwasser가 속삭였다.
리타가 유일하게 기다리는 방문자는 로빈뿐이었다. 로빈은 화요일 오후에 따뜻한 차와 만두를 사다 주었다.
-우다영 ‘리타의 회전목마’
30살의 태영은 한 번도 살펴보지 않은 이곳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난방배관과 급수급탕공사는 태영이 25살일 때 완료했구나. 30살의 태영은 처음으로 싱크대 개수대 아래 있던 기이한 괴물체를 살펴보았다. 이건 도대체 왜 필요한 거지.
자본이나 물가, 노동, 전쟁 같은 단어를 가끔 써서 물어보니 할머니한테 들었다고 말해줬어요.
-우다영 ‘리타의 회전목마’
관리실에서 소개해준 설비업자가 그걸 난방분배기라고 불렀다. 저거는 구동기라고 했다. 안에 양초 파라핀 같은 게 들어있어, 녹았다 차가워졌다 하며 온도를 조절해 주는 거라 했다. 역시 어려운 단어였다.
네, 로빈은 그 사람들이 더 들어오면 미국이 쓰레기통이 될 거라고 했어요. 우리 먹을 햄버거를 빼앗아 먹고, 우리가 쓸 휴지를 빼앗아 쓸 거라고요.
-우다영 ‘리타의 회전목마’
그림 속 서명에서 훈데바르트가 소리질렀다. 왜 관리비는 그러면서 따박따박 받아가는 거야. 30살의 태영은 처음으로 구겨버린 관리비 명세서를 봤다. 보랏빛 멍을 찍은 펜으로 꼼꼼히 메모하며 자세히 들여다봤다.
로빈은 무엇하고도 싸우고 있지 않아요. 싸움은 할머니가 하고 계시네요. 왜 늙은이들은 이유와 의미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어요. 어설프고 흉칙한 괴물을요.
-우다영 ‘리타의 회전목마’
하수도료, 장기충당수선금. 이게 다 뭐지. 자동이체 통장은 절대 청구된 비용과 싸우지 않았다. 아, 이게 K팝 같은 K아파트의 실상이구나. 자신을 남he도 녀she도 아니라고 하는 샘 스미스가 광장시장에서 낙지탕탕이를 젓가락으로 먹었다는데. 그는 우리 k노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종양이고 쓰레기 같은 괴물 아닌가. 파란만장 k적 이원론 아닌가.
나한테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은 다 가난한 사람들예요. 그리고 나도 가난해요.
-우다영 ‘리타의 회전목마’
이것들이 이제 다 고철더미가 되었다고 했다. 업자는 관리실에 도움을 요청하라 했다. 전화를 하니 소장은 이곳은 공용부분이 아니라 개인이 처리하라고 했다.
목마는 48마리 말과 두 대의 마차로 이루어져 있고,그것들은 천천히 완벽한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돈다. 영원히 같은 속도와 리듬으로 돌며 맨해튼과 이스트강의 멋진 두 다리를 보여준다. 단돈 2달러에.
-우다영 ‘리타의 회전목마’
30살의 태영은 단 2개의 날과 2개의 빨간 에나멜 구두로 이루어진 피겨스케이트를 꺼내 신고 얼음판을 미끄러졌다. 스케이트는 태영의 ‘제 4의 피부’였다. 피부도 옷도 집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태영은 * 천개의 마을 꿈을 꿨다.
30살의 태영은 화단에 애나벨수국을 심었다. 꽃말이 우주의 하모니인 황화 코스모스를 가꿨다. 빈 경비실에 버려진 탁자와 의자를 모았다.
그곳은 해머와 몽키스패너, 전동드릴 같은 걸 빌려주는 사물도서관이 되었다. 어떤 곳은 동화책 카페가 되었다. 어떤 곳은 혼자만의 티티카카 호수, 떠도는 섬 이어도가 되었다.
또 다른 어떤 지금-여기는 고정관념 ‘새끼손가락만 이용하여 깨기’ 명소가 됐다. 아이스 버킷 뒤집어쓰기나 폴링스타falling star에 역행하여 낮은 곳에서 위로 사진 올려찍기 챌린지 장이 되었다. 미소 우동 같은 생각 투명의자가 되어줬다. 30살 태영은 대표 회의에도 따박따박 참여했다.
그곳으로 훈데바르트바서가 백 개의 강물을 제공했다. 그 강 한 줄기를 떠서 칵테일 축제를 했다. 아이들이 색색 영롱한 종이등을 만들어 걸었다. 같이 모히또를 만들었다.
30살의 태영은 지금도 기억한다. 모히또 만드는 법. 이런 내용이 있었다. 애플민트를 잘 씻어놓습니다. 잎 서너 장을 손바닥에 놓고 가볍게 박수를 치듯 애플민트를 깨우세요. 으깨지면 절대 안됩니다. 향이 뭉개져요.
30살의 태영은 가볍게 박수를 치듯 그렇게 ‘천개의 마을 꿈’을 깨웠다. 아이들이 재잘재잘했다. 초등학생 예진과 민서, 보현이는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처음 보는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그애들이 모히또에 잘 깨여난 애플민트를 넣고 예쁘게 라임 장식을 했다. 참 좋다, 그치, 그래. 그래, 그래. 살짝 박수를.
30살의 태영이 칵테일 중에 모히또를 선택한 건, 그 말이 스페인어 ‘마법의 부적Mojo’에서 유래해서이다. 아이들이 종이등에 소망을 적어 걸었다. 내년에도 ‘애플민트 깨우고 싶다, 진심.’
30살의 태영은 그렇게 살짝 박수치듯 깨어났다.
* 천개의 마을 꿈: 어떤 자치 시의 마을 공동체 프로젝트, 슬프게도 2023년 예산 경감으로 폐지되었다.
*훈데바르트바서,
*8인의 작가들 메타소설집, 우다영 ‘리타의 회전목마’
#티라노독서시리즈#기혁시인#마을공동체#아파트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