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잃어버린 게 없는
무인카페에 있다. 혼자다. 싸늘하다. 구석에는 선인장이 있다. 선인장에서 사막의 복사열이 뻗어나온다. 선인장을 쬐고 싶다. 다가간다.
선인장은 뜨개 선인장이다. 몸체는 초록털실이고 가시는 고동색실이다. 곱은 손에 선인장을 낀다. 따뜻하고 폭신한 선인장이다.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선인장이다.
안 보여? 엠이 주위를 가리켰다. 파리는 라임lime에 점령됐어. 공유경제가 턱밑까지 치고 들어오는데 프라뇌르 이야기나 하고 있을 거야?
-정지돈 연작소설
여학생이 급하게 세워놓은 킥보드가 넘어진다. 덤불이 소스라친다. 고양이가 튀어나온다. 놀란 눈동자가 카바이트 등 같다. 지나가던 여자가 킥보드를 바로세워놓는다. 늦었으니 빨리 가.
보니야말로 잃어버린 비트 세대의 진정한 시인이에요, 보니, 그렇죠?라고 다시 말했고 보니는 자신은 잃어버린 게 없다고 대답했다.
-정지돈 연작소설
선인장이 놓인 반대편 창가에 타자기가 있다. 종이가 끼워져 있다. BONNY라고 한 자씩 쳐본다. 사실은 BONNIE다. 잘 쳐진다. 보니는 잔망하게 어여쁜 보니다. Y는 두 번 타닥한다. 잉크가 부족한지 희미하다.
보니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녀의 입안에는 이제 이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정지돈 연작소설
이번에는 BEAT라고 쳐본다. A가 잘 눌러지지 않는다. 소문자로 키를 바꾼다. beat. 잘 된다. 잘 박힌다. 종이가 조금 밀려올라간다.
그 아이는 아주 귀여웠고 어렸기 때문에 인형을 보면 눈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눈알을 빼려고 했다.
-정지돈, ‘나자’의 문장에서 인용
타자기에서 종이를 뺀다. 종이를 손으로 뜯어 아이를 만든다. 눈을 그려놓고 손가락에 손톱을 그려넣는다. 옷도 만들어 입혀본다. 이 종이 여자는 보니 브렘저다. 아니다. 자클린 랑바다. 레오노라 캐링턴이다.
랑바는 두 손을 뻗어 트로츠키가 캐낸 선인장을 받았다. 그걸 파리에 가져갈 건가요? 트로츠키가 물었다. 랑바는 부케로 사용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누구의 결혼식입니까?
-정지돈 연작소설
망명지에는 선인장이 있다. 따갑고 키가 크다. 가시가 몸 속에 들어가면 혈관을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인장은 부케가 될 수 있다. 가시를 모아 거위털 대신 침구에 넣어들 수도 있다. 그걸 덮고 따끔따끔 숙면에 들 수도 있다.
근데 엔씨의 자동번역원고는 확인했어? 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절로 쓰여진 부분이랑 엔씨가 번역한 부분 필체가 완전 같더라구? 그래, 그러면 어떻게 된 거야?
-정지돈, 지금은 영웅이 행동할 시간이다
타자기가 저혼자 타닥댄다. 전동열차처럼 움직인다. 종이가 밀려올라간다. 다시 저혼자 종이를 끼운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엔씨의 헬멧에 달린 카바이트 둥근 불빛이 원고를 비추었고 미색 종이가 빛났다. 그렇죠. 그게 정말 이상한 점이에요.
-정지돈, 지금은 영웅이 행동할 시간이다
누가 글을 쓰는가. 타자기는 저혼자 뽐내고 우쭐한다. 내용도 없는 종이를 토해낸다. 문장은 서로 겹쳐 있다.
이 타자기를 덤벨로 써도 글을 쓰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잔디깎이를 끌고 앞마당을 왔다갔다 하거나 나무를 베어 책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지돈 ‘내부순환’
무인카페에 다른 창가에는 그리핀griffin 상이 있다. 부리가 부드럽게 구부러져 있다. 그 부리로 깍깍 쪼아모은 문장들이 타자기에서 부서지고 깨진다. 파괴된 문자의 왕릉. 읽지 않을 수 있어 기쁘다.
이 무인카페에는 화장실이 없다. 급하면 한참 걸어서 포르말린 냄새 나는 24시동물병원으로 몰래 스며들어야 한다. 종이컵을 들고 매뉴얼을 읽으며 우왕좌왕하면 멀리서 지켜보던 주인이 지시를 한다.
컵을 기계 아래 동그라미 속에 놓으세요. 잘못 놓으면 흘러넘칩니다.
제목이 길고 길다. 흘러넘쳐 땅거미가 덮힌다. 컵에 주워담을 수가 없다. 컵에 무임승차한다. 놀이공원의 찻잔처럼 뱅그르 돈다. 이동mobility한다.
*Leonor Fini , 여행자
*정지돈,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작가정신,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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