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물림, 그리고 그걸 끊어내는 의지
내가 이 시리즈의 첫 화에 언급했던 최고의 매니저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이 회사에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이유이자, 내 커리어 사상 최고의 매니저. 하지만 안식휴가를 떠나 돌아오지 않은 그녀.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이직처가 정해지고 회사에서 Notice period (인수인계 기간)을 끝마치는 동안 심적으로 여유로워진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가 회사를 떠나고 가끔 링크드인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둘 다 런던에 살면서도 이렇게 실제로 만나 커피를 마신 것은 처음이었다. 나도 바빴고 그녀도 바빴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만난 그녀가 카페에 들어올 때 나는 거의 그녀를 못 알아볼 뻔했다.
금발로 염색을 했기도 했지만, 그녀의 표정과 에너지가 너무도 밝아졌기 때문이었다. 회사에 다녔을 때 그녀는, 항상 나에게 깍듯이 친절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매일 바쁘고 피곤해 보인다는 인상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금세 예전으로 돌아간 듯 편안함을 느꼈다. 그래, 이런 기분이었지. 나의 최고의 매니저와 대화하는 기분은.
더 이상 매니저와 리포트 관계가 아닌 우리의 만남은 훨씬 편안했다. 우리는 자매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웃으며 그간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의 최고의 매니저 테일러는 그녀가 왜 회사를 떠나게 됐는지 처음으로 내게 털어놓았다. 번아웃이 와서 안식휴가를 가게 되었고, 휴가 이후 영국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고 회사에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그녀의 온몸에서 거부 반응이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나 또한 번아웃으로 인한 신체적 증상을 겪었기에 그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테일러와 내 예전 팀장 찰리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찰리가 테일러의 매니저가 되면서, 그녀는 마이크로매니징에 시달렸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찰리가 전날 밤 보낸 20여 통의 메세지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찰리가 친구로서는 너무 좋은 사람이지만, 매니저로서는 끔찍하다고 했다. 그녀는 퇴사 후 찰리와 연락을 끊은 듯 보였다.
모든 것이 퍼즐처럼 끼워 맞추어졌다. 왜 찰리가 나의 끔찍한 전 매니저 켈리를 그토록 감싸고돌았는지, 심지어 피해자가 나뿐만 아니라 여러 명으로 늘어가는 상황에서 왜 켈리의 행동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 찰리는 본인 스스로가 마이크로매니저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여파들을 인지조차 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찰리와 켈리가 다른 점은, 찰리는 사람 자체는 좋은 사람이지만 마이크로매니저라면 켈리는 마이크로매니저이면서 약자를 괴롭히는 나르시시스트라는 점이 달랐지만, 결국 둘은 마이크로매니저라는 점에서 똑같았다.
마이크로매니저 찰리 밑에서 똑같이 마이크로매니징을 했던 켈리. 성차별적인 회사들에서 살아남았지만 본인보다 어린 여자 부하직원들에게 성차별을 하는 켈리. 이 모든 상황들은 폭력과 상처의 대물림을 연상시켰다.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당한 시어머니가 본인의 며느리에게 당한 것들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이야기, 사회적으로 성공할 기회를 박탈당했던 어머니가 본인의 딸의 성공을 질투하고 폄하하는 이야기들 - 자신의 곪은 내면을 돌아보지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것 아니 가끔은 그보다 더한 것들을 반복하는 이런 서사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들어본 사례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피해자로서 이들의 서사를 이해해 주고 감싸주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선을 긋고 싶다. 그들의 과거는 자신이 알아서 돌아보고 치유해야 할 상처이고 자신의 상처가 어땠든 그걸 생판 상관없는 타인에게 화풀이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본인이 찰리로부터 끔찍한 마이크로매니징을 당하면서도 나를 그로부터 보호했다. 나는 테일러를 매니저로 두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녀가 나를 마이크로매니징한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근무기간 단 한 번도 찰리를 욕하거나 다른 매니저나 동료들을 험담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태풍이 부는 비바람 속에서 작은 우산이었다. 그녀 자신은 비를 다 맞으면서도, 나는 그녀의 우산 속에 있었기에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얼마나 보호를 받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켈리가 입사하기 전, 팀장 찰리와 내가 직접 같이 일하며 의견이 엇갈렸 던 적이 있었다. 찰리가 내게 지시를 내리는 방식이 굉장히 압박이 심하고 숨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그때 찰리는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자신보다 높은 직급들에게서 내려오는 압박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내가 켈리와 찰리에게서 벗어나 다른 팀인 제임스의 팀으로 옮겼을 때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져야 했다. 제임스와 찰리는 둘 다 20여 명의 팀원들을 이끌고 있는 헤드 팀장 직책이었고 둘 다 같은 매니저 밑에 있었지만 제임스는 나에게 단 한 번도 마이크로매니징을 하지 않았다. 제임스 밑에 있는 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것이 나이와 경력의 차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테일러는 켈리보다 훨씬 어렸고, 제임스와 찰리는 동갑이었다. '나도 당했고 다른 이들도 그러기에 나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와 '나도 당했고 다른 이들도 그렇지만 나는 내가 통제가능한 범위 안에서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는 정말 다른 신념과 행동 그리고 결과를 낳는다. 물론 후자가 훨씬 힘들다. 나는 후자가 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훨씬 어렵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막상 실천하기가 몇 배는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테일러와 빌과 같은 매니저들이 흔치 않고 대단한 매니저들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렇게 의식적으로 폭력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한 회사에 다니거나 직급이 높아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닌데 우리 사회에서 어른 껍데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질적으로 어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리더, 매니저라는 타이틀이 단순히 자신의 빛나는 커리어 성취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진짜 의미는 자신의 부하직원들을 보호하고, 더 나은 길로 인도하고, 성장을 돕고, 그렇기 위해서 자신이 가끔은 보이지 않는 희생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그 희생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외로울 수밖에 없는 자리인데 타이틀과 돈만 보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희생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은 매니저들이 있다. 나쁜 매니저들은 타산지석으로 삼고, 좋은 매니저는 롤모델로 삼으면 된다. 나는 과거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다른 내일을 만들어갈 자유와 힘이 나 스스로에게 있다.
무엇이 상처를 대물림하는 매니저와 그렇지 않은 매니저들의 차이를 만드냐 하면 나는 자기반성(refelction) 능력의 차이라고 말하고 싶다. 좋은 매니저들은 실수를 하지 않고 완벽하기에 좋은 매니저들이 아니었다. 테일러와 빌도 나와 같이 일하면서 잘못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차이점은, 항상 주변 사람들, 그들이 부하직원일지라도 피드백을 물어보았고, 피드백을 받았을 때 진심으로 경청하고 자신의 개선점을 고치려고 했다. 켈리와 찰리는 단 한 번도 내게 피드백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물어봤어도 형식적이었고 실질적으로 고려하거나 받아들인 적이 없으며, 피드백을 공격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듣기 싫은 피드백을 준 이들을 간접적으로 처벌했다. 그렇기에 켈리와 찰리 주변에는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했다. 직급이 높을수록 원래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적을 수밖에 없는데, 설사 용기를 내 솔직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처벌받는데 누가 위험을 감수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