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회사에 10억 벌어주고 인사고과대상 된 썰 에필로그下

퇴사 후 나에게 남은 것들

by 곰비

퇴사 후 남았던 것은 결국, 사람들.

보통 퇴사를 한다는 것이 좋은 이유에서 하는 이유가 드물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이 회사에서의 모든 경험이 나빴던 것은 아님을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상기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나는 테일러라는 최고의 매니저를 만났고, 빌에게서 타인을 존중하는 커뮤니케이션을 배웠다. 내가 퇴사를 하겠다고 한 날, 이 회사에서의 나의 마지막 매니저인 빌은 영국인 아저씨 답지 않게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내 마지막 1:1 면담에서 내가 그동안 켈리에게 당했던 이야기들을 하자 우리 둘은 감정이 북받쳐 미팅룸에서 어린아이들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어쨌거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도, 치유하게 도와준 사람들도 모두 다 같은 회사 안에 존재했다.


퇴사를 하겠다고 주변에 알리고 나서 정말로 많은 이들에게 연락이 왔다. 켈리에게 일하는 1년간 그녀의 가스라이팅에 가려져서 스스로 잊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로 많은 이들에게 내 능력과 성과를 인정받고 있었다. (이럴 거면 평소에 말해주지 왜 퇴사할 때 돼서야 말해주는 건데 ^^;;) 나와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은 따로 준비한 선물들과 카드들을 주었고 이 따뜻한 마음들은 나를 울컥하게 했다. 이들은 내가 그동안 켈리에게 당했던 이야기들을 경청하며 같이 분노하고 슬퍼해주었다. 영국에서는 보통 퇴사날 퇴사자를 위해 회식을 하는데, 정말 많은 이들이 내 마지막 날을 축하해 주고 앞으로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leaving.png 모두의 신원보호를 위해 안타깝지만 블러처리..



피해자가 또?

내가 완전히 퇴사를 하고 일주일간의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나와 그렇게 친하지 않던 한 동료로부터 장문의 링크드인 메세지가 왔다. 긴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부탁이었다. 그녀와 한 시간 정도 콜을 했다. 얘기인즉슨 그녀의 원래 매니저가 출산 휴가를 간 동안 마야가 그녀의 임시매니저가 되었고, 새 매니저인 마야의 마이크로매니징 때문에 너무 괴롭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 마야는 몇 달 전 승진을 했다.


부하직원의 승진에 도움을 줄리 없는 켈리가 준 승진은 아니었고, 마야가 빈 매니저 자리에 스스로 지원을 해 면접을 봐서 얻게 된 자리로 인한 승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당시 살짝 마음이 무거웠다. 마야가 매니저가 된 것은 진심으로 축하했지만, 이것이 나의 개인적인 실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켈리 밑에서 나와 마야는 함께 일했지만, 나는 다른 팀으로 전배가 되었고 마야는 비록 다른 팀 이동이긴 했지만 본인이 원한 자리로 승진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후회는 곧 딱히 의미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마야는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고 나에게 딱히 피해를 준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녀가 켈리 밑에서 일하는 상황이 그녀 스스로도 괴롭고 이상한 상황이라고 판단을 내렸지만 취업비자를 위해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내 멋대로 착각해서 이해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내가 켈리 밑에서 괴로워할 때에 나의 편에 서서 나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녀를 딱히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야는 자신도 켈리와 비슷한 결의 사람임을 드러냈다.


가해자의 자리를 반복하는 승진의 의미

마야가 승진이 된 후 그녀와 가끔 협업을 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녀는 켈리와 정말로 똑같은 행동들을 했다. 그리고 마야와 같이 일했던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괴로움을 토로하는 말들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 부하직원이 직접 내게 그간의 사실들을 전했을 때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켈리가 일하는 방식이 비정상적이고 부하직원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는 어떤 자의식이나 판단이 없었다. 마야가 과거 내가 켈리에게 받은 고통을 호소할 때 왜 나를 도와주지 않았는지 또 한 번 명확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켈리 밑에서 자신도 번아웃이 왔음에도, 켈리 밑에서 몇 번이고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이고 일을 못하는지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도 그걸 자신의 새 부하직원에게 그대로 했다. 마야의 새 부하직원이 당한 이야기들은 켈리가 내게 했던 행동과 100% 유사했다. 마야는 켈리를 멘토로 두었고 그녀와 일하는 것이 좋다고 주변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켈리가 나와 다른 여자부하직원들에게 얼마나 마야의 뒷담을 하고 다녔는지는 그녀는 알 길이 없겠지만.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의 결말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확인하는 순간들이었다.

내가 만약 승진을 원했어도 그 자리를 원했을까?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내 문제가 아니다

나는 새롭게 피해자가 된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보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이후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그녀의 선택이었다.


나는 새로운 피해자인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내가 이 문제를 대응하는 내 감정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패턴이 이제는 명확히 보이기도 했고, 내 상처도 어느 정도 치유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피해자들이 나타나서 본인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마다 내가 PTSD를 겪는 것처럼 그 이야기를 듣는 게 심적으로 힘들었다면, 이제는 그들의 아픔에 공감을 하되 그 고통이 생경히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퇴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팀이 달라도 회사 건물이 같으니 싫든 좋든 켈리를 마주쳐야 했는데. 내가 퇴사를 한 그 이후로 켈리와 찰리는 나와 전혀 상관없고 내게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타인 1, 2였다.


그들이 회사에서 무엇을 하고 어떤 잘못을 반복하던지 그것은 이제 내 알바가 아니었다. It's not my problem to fix. 나는 타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에너지와 시간을 쏟지 않는다.


JP모건에서의 새 출발

곧 새 회사 JP모건에서 새 출발을 시작한다. 나를 괴롭히고 주변에 내 뒷담을 하고 다니던 켈리가 없는 곳에서. 물론 큰 회사에서 일한 다는 것은 어디에나 이상한 사람이 존재할 확률도 높기에, 항상 내 미래가 장밋빛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회사는 어느덧 나의 7번째 회사이고, 그 간의 경험을 통해 이상한 매니저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경험이 생겼다. 다음에 비슷한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문제를 상대하는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를 것이다.



keyword
이전 09화회사에 10억 벌어주고 인사고과대상 된 썰 에필로그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