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9살 아들이 고사성어, 속담 등 관용표현에 푹 빠져있다. 재밌는 건 나도 아들 나이 때 고사성어와 속담 책을 매우 즐겨봤다는 거다. 이런 것도 유전인가? 아무튼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도서관 갈 때마다 빌려줬다. 그런데 반납하기가 무섭게 또 빌려달라고 하고 너무 자주 읽다 보니 책이 훼손되는 게 염려가 되어 편하게 보라고 아예 세트로 사다 줬다.
처음에는 열심히 읽기만 하더니 요즘은 알게 된 표현들을 상황마다 써먹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아빠 결혼기념일이 다음 주인가?"
"어?! 그건 왜?? 선물이라도 사주게?!"
"참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마시지 마!"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속담 활용에 감탄하며 기특해했더니 아주 재미가 들린 모양이다.
"오빠, 왜 이렇게 늦게 와?! 심심했는데.."
"우리 동생이 오매불망 오빠만 기다렸구나!"
"오늘 저녁은 삼겹살이야!!"
"우와!! 마침 고기가 당겼는데. 이심전심이구만!!"
"엄마 나랑 동생이랑 누가 더 그림 잘 그렸어??"
"둘 다 잘했어! "
"오십 보 백보야?? 난형난제야?? 형만 한 아우 없다는데
. 그래도 내가 더 낫지 않아?"
어찌나 잘하는지.. 신통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팔불출소리 들을까 봐 어디가선 말 못 하고 남편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얘가 속담이랑 고사성어를 기가 막히게 써. 날 닮았나 봐 아하하하하하."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온 아이를 크게 혼냈다. 어제는 한겨울에 반바지를 입고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들어왔길래 감기 걸린다고, 담부턴 이렇게 입지 말라고 좋게 말했다. 그런데 오늘 태권도 도복만 입은 채 태권도장에 다녀온 게 아닌가. 펄럭이는 도복 사이로 맨살이 훤히 드러났다.
처음엔 이 추위에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걱정되는 마음이었는데 결국엔 화를 내고 말았다.
"대체 한 겨울에 이러고 입고 다니는 게 말이 돼??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화 다음의 감정은 후회다. 왜 늘 후회는 한발 늦을까?
뭐 그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기도 하고 큰소리친 게미안하고.. 그렇다고 바로 사과하는 건 어쩐지 좀 민망하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면서도 굳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애꿎은 청소기만 쌩쌩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엄마. 미안해. 우리.. 칼로 물 베기 하자.."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말에 곧바로 대꾸도 하지 못했다.
"엄마. 칼로 물 베기 하자. 응?"
"야 그건 부부싸움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웃는 나를 보며 아들이 말했다.
"우리도 칼로 물 베기 맞네~"
매번 혼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옆구리를 파고드는 아들을 보며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