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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이스댕 Nov 02. 2024

힘들고 먼 길을 가는 법

그냥 사는 이야기


운동을 좀처럼 하지 않는 나에게 1킬로미터도 달리는 일은 너무 힘들다. 사실 귀찮음에 가깝다.

아직 서늘한 오후 바람을 맞으며, 맑다가 흐리다를 반복하는 좀처럼 가늠하기 힘든 뉴질랜드의 날씨에 반팔 차림으로 밖에 나가서 뛴다는 건 나 같은 성격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몸동작으로 반바지와 반팔을 꺼내 입는다. 팔에 서늘함이 느껴진다.

'그래 뭐 한번 뛰고 오지 가볍게'

얼마 전 새로산 운동화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가볍게라도 걷고 오는 게 좋게다.


밖을 나서자, 역시나 바람이 차갑다.

하지만 일단 나서니  아직, 내 다리와 팔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래 해보자.


50미터 골목을 돌자마자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우리 동네가 그렇다. 달동네까지는 아니지만, 오르내림이 많은 곳이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200미터가량이 가파른 오르막이다. 걷기도 숨찬 오르막인데, 조깅한다고 나와서 걷고 싶지는 않았다.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라도 뛰는 모양새를 보이고 싶었다.




단순히 일상의 반복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하루가 뭔가를 쟁취하기 위해, 아니면 혹시나 구조조정당할 때를 대비해 뭔가를 준비해야 하는 그런 시간을 20년간 보내다 보니, 진짜 마음 편하게 일하거나, 일에서 멀어져 나를 생각해 볼 시간을 가져보기가 어려워졌다.


생각해 보면, 아침 7시에서 저녁 11까지 죽어라 일하던 신입사원일 때가 지금보다 마음의 여유가 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왜 이렇게 마음의 여유가 없고, 나를 돌아보기가 힘들어졌나? 꿈은 어디 갔나?




2킬로만 뛰어 보자고 한 게 3킬로미터는 넘은 것 같다. 나도 살아 있구나.

그런데, 힘들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을 2km 정도 뛰다 보니 이게 뛰는 게 아니라 다리로 땅을 밀어서 겨우 앞으로 가는 척하는 것 같다. 이게 고속도로 옆으로 따라 나 있는 길이다 보니 사실 볼 것도 없다. 그냥 뛰는 길이다. 주택가와 자전거 길을 가르는 똑같은 모양의 담벼락이 길게 시선 끝까지 연결되어 있고, 옆으로는 가끔 트럭이나 버스가 빠르게 지나간다.


콘크리트 바닥의 질감이 하나하나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 감각이 모두 지면으로 가면서 그 콘크리트 바닥이 나를 뒤로 끌어당기는 게 느껴진다. 신발바닥이 땅에 끌리면서 부딪히는 소리, 작은 모래알맹이들이 눌려서 내는 소리.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다음 두발 앞 정도만 내다본다. 이미 도착해야 할 곳은 머릿속에 있다. 다만 거기까지가 너무 멀고 거기까지 힘들 걸 생각하니 지금 포기하고 싶어 지는 거다. 그래서 두발 앞 정도만 내다본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넘어지지 않을 정도만.




가끔은 이렇게 사는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한다.

뭐 하려고 이렇게 달려와서, 아직도 달리고 있을까?


여전히 나는 힘들지만 땅을 밀어내는 속도는 줄어들었다. 세상은 빨리 앞으로 나가는데 그것을 따라 잡기는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마치, 파도치는 바다에 그냥 떠 있기만 하려고 하는데도, 팔다리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고, 그런데, 그게 더 힘들어지는 것 같이.


눈에 보이는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 몸의 구석구석 모든 부분이 새로운 세포로 대체되었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도, 그걸 아직 나라고 생각하고 데리고 다니는 이유는 뭘까? 왜 새로운 나를 옛날에 존재했던 전혀 다른 나와 비교하는 걸까?




마지막 고개이다.  저기를 돌면 목표지점이 보일 것이다. 그 목표지점은 거기서부터 내가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지점이다. 그런데, 그곳이 보이는 곳 까지가 1킬로미터는 되어 보인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내 두 발이 보인다. 수십 년간 나를 지탱해 줬던 그 두 발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그래, 목표지점을 생각하지 말고 두 발만 내다보자. 그렇게 두 발이 잘 움직이는지 매 순간 확인 하면서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그리고 그 두발 앞에 있는 풀들 - 평소에는 존재하는지도, 서로 어떻게 다른 지도 몰랐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길가의 이름 알 수 없는 풀들이 기다란 잎으로 내 다리를 스치고 있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비슷해 보이고 항상 배경으로만 존재했던, 하지만 각자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자라고, 서로 다른 종류인 것 같기도 한 이 풀들을 이전엔 왜 자세히 보지 못했을까?

나를 잊어버리고 그들이 바람에 어떻게 흔들리는지 관찰한다.




우리에게는 언젠가는 끝이 있다. 나에게도 끝이 있다.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과 마치 끝이 없는 듯 오늘을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그 끝이라는 게, 매일의 끝이고 아침마다 새롭게 시작한다면.


어차피 끝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게 되어 있다, 오늘이던, 1년 후이던, 40년 후이던.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사과나무를 심는 이유를. 내가 없어지면 있던 세상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없던 게 된다. 다시 말하면 끝을 가질 수 있는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끝이란 원래부터 없는 것이고 내가 있는 시간, 내가 존재하는 세상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냥 존재하는 오늘에 집중하고 이 순간에 집중하면 된다. 하던 일을 계속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의 세상과 나를 존재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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