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는 이야기
흔히 한국의 빠른 발전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근면, 성실, 빨리빨리 문화 얘기를 꺼낸다. 하지만 나는 뉴질랜드에 살면서 전혀 다른 곳에서 그 답을 찾았다. 속도의 차이는 단순히 성격이 급해서나, 경쟁이 심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온다.
변화의 기준점이 다르다
한국에서 "잘 되고 있나요?"라는 질문은 사실 이런 뜻이다. "우리가 꿈꾸는 모습에 얼마나 가까워졌나요?"
목표로 하는 미래의 상태가 먼저 있고, 현재는 거기에 얼마나 도달했는지로 평가된다. 당연히 갈 길이 멀어 보이고, 그래서 항상 바쁘고 항상 모자란다.
뉴질랜드는 다르다. "Is everything Ok?" 여기서 같은 질문은 이런 뜻이다. "적어도 별일 없거나, 어제보다 나아졌나요?"
어제가 기준이다. 어제보다 나빠지지 않았거나 조금만 좋으면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조급함이 생기지 않는 건 당연하다. 기준 자체가 이미 달성된 과거에 있으니까.
같은 말이 같은 그림을 만드는가
뉴질랜드는 다민족 국가다. 같은 영어 단어가 사람마다 다른 풍경을 불러일으킨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기대하는 결과물의 모양이 다르다. "깔끔하게"가 어떤 사람에게는 미니멀리즘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꼼꼼함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히 정돈된 상태다.
그래서 여기선 합의에 이르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프로젝트가 된다. 때로는 그 합의가 아예 불가능하기도 하다. 정밀한 소통이 생명인 건설 현장에 중국, 인도, 마오리, 필리핀, 태평양 섬나라 출신 작업자들이 모여 있다. 공통어는 영어지만, 각자가 떠올리는 영어는 다르다. 소통의 정밀도는 가장 엉성한 수준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오클랜드 시내에 작은 지하철 하나 놓는 데 10년째 걸리고 있는 이유가 단지 정치인의 근시안적 전략이나, 부족한 예산이나 복지부동 행정 때문만은 아니다. 의사 소통과 같은 그림을 그리며 의사결정을 하는데 어쩔 수 없는 다문화 언어라는 장애물이 존재 하기 때문이다.
책임의 밀도가 다르다
아마도 이것이, 한국이 빠를 수 밖에 없는 가장 결정적 이유가 아닐까 한다.
한국에서는 직무가 아닌 직책을 받는다. 담당자가 된다는 건, 그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자가 된다는 뜻이다. 전임자가 남긴 문제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심지어 내 계약서에 없는 일도. 내 영역에서 생긴 일이면 내가 처리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반드시 누군가의 일이 된다. 공백이 생기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에서 많이 듣는 고객의 요구는 "매니저 나오라고 하세요!"이다. 예외적인 상황이라도 누군가는 담당을 하거나 책임지고 처리할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이 감각은 일상의 작은 순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치과에 예약 확인하러 갔다가 의사에게 빈 시간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치료까지 받는 나라가 한국이다. 서양에서는 진료는 진료대로, 치료는 치료대로, 몇 달씩 따로 예약해야 한다. 잠깐이면 될 처치라도 융통성이라곤 없다. 서비스 창구에서도 그렇다.
한국에서는 앞사람이 서류를 읽는 동안 뒷사람의 용건을 미리 물어보고 준비한다. 서양에서는 앞사람의 일이 완전히 끝나야 다음 사람이다. 앞사람이 가방 속에서 카드를 찾는 그 시간도, 그냥 기다린다.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 빈 시간을 그냥 두지 않는 것. 그것은 결국 "내 영역의 공백은 내가 채운다"는 책임 감각이 몸에 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직렬이냐, 병렬이냐. 그 차이가 쌓이면 사회 전체의 속도가 달라진다.
뉴질랜드는 책임 중심이 아닌 직무 중심이다. 계약서에 명시된 것이 내 일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공백이 된다. 담당자가 휴가를 가면 그 업무는 그대로 멈춘다. 매니저는 그 공백을 직접 메우는 게 아니라, 임시 계약직을 구하거나 담당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이 나라에서 복지 제도의 사각지대가 생기는 것도 같은 이유다. 상위의 원칙 없이 부분적으로 만들어진 법들 사이의 빈틈은, 누구의 직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니 고쳐지지 않는다.
뉴질랜드에서 저소득층에게는 복지 수당이 주어진다. 이것은 누군가의 정치인의 입안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해당 계층으로부터 선거표를 받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근로수입이 늘면 수당이 없어지는 구조인데, 문제는 임금이 오른 것보다 없어지는 수당의 크기가 더 크다는 데 있다.
새 일자리를 얻어 월급이 올랐는데, 오히려 손에 쥐는 돈이 줄어드는 역소득 구간이 상당히 넓게 존재한다. 그 구간을 버텨내야 비로소 실질 소득이 오르지만, 어제보다만 나으면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당장의 혜택을 포기하고 그 시간을 굳이 버텨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고민하거나 책임질 사람은 없다. 그 역소득 구간에 속하는 사람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사람들일 뿐이니까. 그들은 멈춰있다.
하나의 철학에서 온 것들
이 세 가지 차이는 사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 바로 Top-down의 철학이다.
한국 사람들은 위에서 내려준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어른이 가르쳐준 것, 학교에서 배운 것, 선배가 전해준 방식을 존중하고, 그렇게 내려주는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여 존중을 표시한다. 윗사람들로부터 내려받는 그것이 낡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인들처럼 모든 것을 스스로 부딪혀보고, 실패해 보고, 직접 증명한 뒤에야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낭비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 보라. 한국은 그 과정을 건너뛴다. 이미 누군가 걸어간 길이라면, 그 위에서 시작하면 된다.
한국이 빠른 건 성격이 급해서가 아니다. 이미 검증된 것 위에서 시작하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국 밖에서 바라본 한국인들은, 정말이지 효율적인 사람들이다.
빠름은 단순히 타고난 기질이 아니다. 물려받은 것을 믿고, 주어진 자리에서 공백을 채우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지금을 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화다. 대한민국이 타민족을 정복하여 자원을 빼앗지 않고도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철학이 사회 전체에 스며든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