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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세포
5000원의 행복
by
전나무
Feb 2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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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요소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주문한 음반과 DVD, 책이 배송되면 진수성찬을 받은 양, 무엇부터 보고 들어야 할지 마음이 바빠지지요.
CD
한 부분을
슬쩍 맛보거나 책의 속표지에 책도장을 찍고 구입한 날짜를 적어 넣는 사소함이 내겐 행복이 세포입니다.
혼자 하는 일을 좋아하는 성향이다 보니 이기심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는 것이 이기적이라는 거죠.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책과 음악을 가까이하는 이유는 앎의 즐거움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행위를 '완물치지'라 하더군요.
이 것은 중국 사서의 대학 중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바꾼 말인데 '가지고 놀면 앎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앎이란 크기와 경중을 떠나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 두 가지를 공유하는 시간을 사랑합니다.
읽고 있는 책은 중턱에도 못 갔는데 리피트로 걸어놓은 베토벤 첼로 소나타가 벌써 하류로 흘러가고 있어도 기분 좋습니다.
잠시 흘러가는 구름 한 점을 바라보거나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는 그런 일상이 꽃시계가 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반복되는 주제를 스물세 번 변주시키는 안톤 베베른의 현대음악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음악은 왜 옛 것이 더 편할까요?
베베른의 파사칼리아는 이런저런 궁금증 속에 끝나고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시작되었습니다.
순간 그동안 그 곡을 들으며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일었지요.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보이고 들리는 한글과 우리말의 편안함이랄까 뭐 그런 거였죠.
백건우의 연주는 항상 담백합니다.
과장과 꾸밈, 허식이 없는 나무의 새 순처럼 정직하지요.
크게 소리 내어 웃는 일이 드물고 느리게 하는 말처럼 느긋한 산책을 즐기지 않을까 합니다.
허겁지겁 서두르는 일이 없고 큰 소리로 화를 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무표정하지만 언제나 심오한 철학이 느껴지는 연주자지요.
그렇다고 무게를 잡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백건우식 피아노라는 말은 생겨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베토벤을 연주하면 베토벤이 되고 쇼팽을 치면 쇼팽이 살아나는 식의 연주를 느끼게 되니까요.
음악은 음표로 하는 뜨개질입니다.
같은 색의 실타래지만 사람마다 솜씨가 다르기에 결과는 같지 않지요.
그러나 작곡가의 디자인에 가장 근접한 작품을 뜨개질하는 피아니스트는 백건우가 아닐까 합니다.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지 1년이 채 안 되는 에드먼 콜로메르는 상당히 안정되고 세련된 지휘를 하더군요.
그가 만들어내는 말러 교향곡 1번 1악장은 베토벤의 6번 교향곡의 정서를 느끼게 했습니다.
백미는 '사냥꾼의 장례식'이라는 회화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된 3악장이었어요.
팀파니의 반복되는 동기에 더블 베이스와 바순 솔로가 어둡고 무거운 카논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그 부분만큼은 사이먼 래틀의 베를린 필에 버금갈 만큼 훌륭했지요.
나는 왜 장송 행진곡이라는 부제의 악장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말러 5번 2악장,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 3악장,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2번 3악장, '죽음과 소녀'라는 부제가 붙은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2악장, 그리고 그리그의 페르귄트 중 '오제의 죽음'까지 가라앉고 어두운 소리의 행진은 마음을 차분하고 편하게 합니다.
말러의 1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은 '지옥에서 천국으로'라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아무리 빠르고 혼잡한 악보라도 규칙은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어떤 곡의 총주든 클라이맥스는 참으로 호쾌하고 멋지지요.
3m 75cm나 되는 기다란 관을 돌고 돌아 겨우 빠져나온 8개의 호른의 소리는 민감하지도 예민하지도 않아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만삭에 가까운 오보이스트 수석과 트럼펫터는 호연이었지요.
가지런한 치아 같은 건반을 넘나드는 피아니스트의 열 손가락이 다 보이는 2층의 가장 앞열, 팀파니 두 세트와 베이스 드럼 두 개, 하프와 4관 편성에 8개의 호른을 갖춘 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의 티켓은 단 돈 5000원이었습니다.
만원의 행복이라는 TV프로그램보다 그날 내가 맛본 오천 원의 행복은 몇 배 더 컸습니다. (2008년 5월)
*봄이 발치에 다가오는 이맘때면 생각나는 음악입니다.
비발디 오페라 Il Giustino, RV 717 (1724) 중 아리아 Sento in seno를 두 대의 피아노로 편곡한 연주인데요.
피치카토 효과를 위해 피아노에 댐퍼를 설치해서 약간은 둔탁하면서 통통 튀는 빗방울 소리를 연상시키지요.
두 대의 피아노가 연주하도록 편곡한 사람은 지금 이 곡을 연주하는 두 피아니스트가 편곡했어요.
ANDERSON & ROE는 줄리어드 음악대학 동문입니다.(Roh는 한국계 미국인)
둘의 호흡이 워낙 잘 맞고 발매한 음반도 많아 혹시 두 사람이 연인 아니면 부부가 아닐까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들은 그냥 듀오 피아니스트일 뿐이랍니다.
VIVALDI - A Rain of Tears - ANDERSON & ROE (출처 : Youtube)
아래 영상은 원곡입니다.(2분 5초)
카운터 테너의 음색과 지금은 거의 사라진 악기인 류트의 이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A. Vivald "Sento in seno" - Jakub Józef Orliński & Cappella di Ospedale della Pietà(출처: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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